No. 1632 [칼럼니스트] 2017년 3월 1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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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 - 그 이상한 뒤안길(02):
‘시해(弑害)’- “스스로 포기한 주권은…”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angpy


‘시해(弑害)’는 원래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죽이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인 경우’에 쓰이는 말이다.

다만 그것이 이상하게 쓰여 이상한 말같이 돼 버렸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시해’라는 용어의 대부분은 10.26사건, 즉 김재규(金載圭)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에 쓰인다.

부하가 대통령을 죽인 것과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 그것은 틀리게 쓰인 말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태연히 사용되고 있으니 더욱 이상한 말이 되고 나아가 이상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10.26을 두고 ‘시해’란 말을 즐겨 쓰는 사람은 임금이나 대통령이나 다 국가원수인데 대통령한테 못쓸 이유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그들은 죽은 대통령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나라의 주인인 ‘국민’을 나라님의 소유인 ‘신민’으로 격하시켜놓고도 태연하기만 하다.

‘시해’라는 말은 10.26직후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이 지휘하던 합수부의 사건 발표 과정에서 처음 나왔다. 나는 그 사건으로 계엄이 선포돼 신문들이 검열을 받는 삼엄한 마당에서 그런 말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잠정적인 현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뒤 주로 보수 언론에서 계속 그 말이 쓰이기에 1993년 10.26을 맞아서 나는 당시 내가 근무하던 서울경제신문에 ‘弑害의 施害’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다른 많은 이들도 ‘시해’라는 말을 10.26에 사용하는 것이 부당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큰 공장에서 폐수가 흘러나오듯 유력 보수지들이 쏟아내는 ‘시해’를 무슨 재주로 막을 것인가.

기가 막힌 것은 최근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지에 ‘시해’란 말이 쓰인 것이다. 그것도 최순실-박근혜 사태와 관련된 것이어서 더욱 어이가 없었다.

그 기자는 최순실 사태와 피살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별개라고 생각했을까. 나아가 그 윗선도 그런 생각이어서 그 기사가 데스크 과정에서 시정되지 않고 나왔을까.

그들은 왜 오늘날의 최순실 사태가 ’弑害‘의 施害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그것이 어느 민주국가의 일 같은가, 아니면 진령군(眞靈君)이 설치던 구한말의 민비 시대의 일 같은가?

그것은 비단 최순실 사태만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독재나 폭정의 문제이기 전에 부패한 왕조의 잔재에서 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건국 초기부터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무능한 왕조가 외세에 나라를 빼앗겼다가 외세에 의해 나라를 되찾은 국민에게 민주주의니 주권(主權)이니 하는 것은 낯선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장미공주‘ 이야기의 1백년간의 잠은 아니지만 36년간의 잠을 자다 깨어났을 뿐이었고 그 풍경은 ’장미공주‘의 그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장미공주‘에서 아래 시종을 패던 중 잠에 빠졌다 깨어난 윗 시종이 그 주먹질을 이어가듯이 일제의 작위를 탐내던 구한말의 지도층을 이어받은 그 후손들은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재산을 탐내는 식으로 가문의 전통을 업그레이드 시켜나갔다.

그런 마당에 ’민주주의‘니 ’대통령‘이니 해보았자 그것을 보는 눈은 36년 전의 시각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19세기말의 기억을 가진 이들은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말을 들었을 때 40여 년 전의 ’황제‘를 떠올렸을 수도 있다.

외세에 왕비가 죽어도 응징도 못하고 다른 외세의 공관으로 피신했던 왕이 이듬해인 1897년 아관(俄館)에서 나오자 갑자기 ’황제‘가 됐으니 국민들의 눈에 ’황제‘가 ’임금‘보다 대단해 보일 리가 없었다.

그것을 만회하려 해선지 너무 거창한 제복을 입은 것도 따지고 보면 서글픈 민족의 자화상이었다.

고종은 왜 하필이면 독일 황제의 복장을 본 땄을까. 당시 독일은 제국주의의 맹주 자리를 탐하던 시기 아닌가.

당시의 세계를 동물의 세계로 보자면 조선은 피식(被食)동물이고 뒤늦게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 독일은 포식 동물의 정상인 호랑이나 사자 격인 영국과 프랑스와 맞설 채비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그런 판에 사자의 가죽을 둘러쓴 산양의 모습이 당시 맹수국가들의 눈에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고도 맛있게 보였을까.

황제가 임금과 비슷했듯이 대통령도 임금과 비슷한 것으로 본 우리 국민들을 탓할 수만도 없다.

하필이면 초대 대통령이 양녕대군의 후손이 되다보니 그런 풍조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李承晩)과 조선왕조의 관계를 두고는 엇갈린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본바닥인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민주주의자 이승만이 체질적으로 왕조를 싫어했다는 설이다.

이승만이 구황실 인사들을 박해해 영친왕(英親王)이 끝내 이승만 재위시절에 환국하지 못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승만이 양녕대군의 후손이라는 점을 자주 자랑했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그가 구황실 인사들을 박해한 것도 민주주의자로써 군주주의를 배격한다는 시각이라기보다는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써 충녕대군의 후손들인 당시의 구황실인사들에 대한 혐오감정의 발로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이승만의 여러 거동에서도 민주주의의 본바닥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보다는 왕 같은 풍모를 느끼게 하는 일이 많았다.

바둑과 얽힌 이승만의 한 에피소드도 그런 느낌을 준다. 그가 한국기원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바둑에 몇 단까지 있냐고 물었으며 9단까지 있다고 하자 “그럼 나는 10단이야”라고 했다는 일화다.

한국기원 인사들은 바둑 9단이 입신(入神)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입신이라고 해봤자 백성이 죽어서 된 귀신인데 대수로울 게 있느냐는 생각이었을까.

한국전쟁 당시 국민들에게 안심하라고 한 뒤 대구로 피신한 모습도 임진왜란 당시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부랴부랴 몽진한 선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승만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부인이 외국인이어서 외척이 없었고 자식이 없었던 점이다.

아들이 없어 국회의장이자 후계자인 이기붕(李起鵬)의 아들 이강석(李康石)을 양자로 들이자 그가 일으킨 요란스런 화제들은 역으로 이승만의 친자가 없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를 말해준 셈이다.

이강석이 학생들의 반대에도 서울법대에 편입학으로 들어간 데는 왕자가 공부하겠다는데 무슨 입학시험이냐는 기류가 깔려 있었다.

이강석은 학생들의 냉대로 서울법대를 그만두었으나 대낮에 명동 파출소장을 구타하는 등 수많은 화제를 뿌렸다.

가짜 이강석 사건은 거기서 파생한 곁가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 젊은이가 이강석을 사칭하며 지방 관서에 들르자 모두들 ’귀하신 몸‘이라고 황송해 하며 칙사대접을 했다. ’귀하신 몸‘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단 왕국에서 통용되는 왕자의 호칭인 셈이었다.

이승만이 민주국가의 대통령다운 말을 한 것으로 기억에 남을 만 한 것은 4.19로 물러날 때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한 말이다.

하지만 그 배경을 들여다보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는 4.19로 200여명의 젊은이들이 죽은 뒤 1주일이 지난 4월26일에야 국민이 원하는 것을 알았단 말인가. 그는 그 사이에도 자유당과 결별하는 등 자신의 생존을 위해 부단히 애쓰는 한편 미국 측과도 숨가쁜 논의를 거쳤으나 미국의 자세가 완강하자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해도 미국이 강력히 원하지 않는다면 하야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1주일을 보낸 셈이다.

이승만이 물러나고 들어선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그의 성향과 관계없이 말 그대로의 대통령이었다. 굳이 왕을 떠올린다 해도 엘리자베스 여왕 같은 입헌군주국의 왕에게나 주파수를 맞춰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5.16으로 민주당 정권이 물러나고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외척과 공주(영애)들 및 왕자(영식)까지 갖춘 왕국의 면모였다.

박 씨들은 그만두고 육영수의 생가마저 웅장하게 복원되고 그의 탄신제와 추모제가 국비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도 그렇다. 그래선지 그의 탄신제나 추모제에 나타나 이러쿵저러쿵 하는 도백이나 군수가 왠지 백성을 돌보는 지방관이 아니라 왕조시대의 능참봉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박정희의 치세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는 그가 피살된 것을 ’시해‘라고 표기한 것이 상징적으로 말해준 셈이다. 그는 왕조시대의 언론을 남기고 간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전두환 시대는 왕조의 면모가 많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우선 박정희와 전두환은 카리스마에서도 차이가 났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팔아먹었던 노하우는 이제 더 통하지 않아서 그는 ’혁명공약‘이라는 그럴듯한 술수를 부릴 수도 없었다. 그저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모조품 격인 ’국보위‘나 만들었으니 카리스마가 생겨날 근거가 박했다.

더욱이 임기가 짧아 국민들은 그가 몇 명의 영애와 영식이라는 공주와 왕자를 거느린 지도 제대로 모른 채 임기가 끝났다.

국민들 대부분이 박정희의 세 자녀 이름을 다 알고 있었던 데 비해 전두환의 2남1녀 가운데 하나라도 이름을 아는 국민은 절반도 못될 것 같다.

하지만 전두환의 경우도 왕조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그의 미국 방문 중 이순자는 한 모임에서 이상한 모자를 쓰고 나왔으며 그것은 한국 왕비들이 쓰는 왕비관으로 알려졌다.

이순자의 경우 X양 사건도 아직 명쾌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소문대로라면 그것은 왕조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건이다.

그것은 임오군란 무렵 민비와 관련된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군란이 일어나자 민비는 황급히 충주로 피난을 했으나 당시의 통신 사정으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확인도 어려웠다. 그러자 고종은 지난날 총애했으나 민비가 무서워 멀리 두었던 궁녀를 가까이 했다.

그 뒤 충주에서 돌아온 민비는 그 궁녀를 잡아다 당시의 소형 다리미 격인 인두로 지졌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보통 사람‘을 표방하여 대권을 잡은 노태우는 그 구호에 걸맞게 왕조의 분위기는 거의 풍기지 않았다. 물론 그가 물러난 뒤 2천억 원 대의 ’내탕금(內帑金)‘을 숨겨 논 것이 적발돼 쇠고랑을 찬 것은 예외로 치자.

그런 분위기는 김영삼 시대에 더 가속됐다. 3당 야합으로 어딘지 짝퉁 민주운동가처럼 비치기도 했지만 그는 왕조시대의 모습을 지우는 데 앞장섰다.

그가 안가를 철폐한 것도 그런 것이다. 말이 ’안가‘지 많은 국민들의 눈에 그곳은 왕조시대의 ’후궁‘처럼 비쳤고 10.26사건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머리를 빌려야 했던 김영삼은 그의 아들(현철)의 머리를 중점적으로 빌린 바람에 ’황태자‘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그 황태자가 아버지의 재위 중 감옥에 갔으니 그는 왕이 아닌 채로 임기를 마친 셈이었다.

그 뒤를 이은 김대중은 일단 정통파 민주주의자라는 점에서 그의 집권은 한국 역사가 왕조시대를 탈피하는 데 거보를 내디딘 셈이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각하‘라는 왕조시대적 존칭을 철폐했다. 그로써는 ’각하‘ 대신 ’님‘이라는 말도 쓰지 말도록 하고 싶었을 것이다. 원래 ’대통령‘이라고 하면 거기에 존칭이 다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일본의 경우 ’교수‘니 ’장관‘이니 하는 모든 직책 뒤에 ’님‘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김대중 자신이 그것을 지적하면서도 갑자기 호칭이 없어 어색하다면 ’님‘을 붙이라고 했다. 그것은 새삼 개혁과 인습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김대중의 아들들도 구설수에 올랐다. 그러나 ’황태자‘로 불리지는 않았고 또한 대통령 아들로 감옥에 갔으니 한국은 왕조시대로부터 민주공화국으로 가는 과도기에 접어든 느낌이었다.

그런 추세는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에서 가속됐다.

그가 검사들과 기탄없는 대화를 나눈 것은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를 시사했다. 그가 자신만만하다 못해 방자한 검사들에게 곤혹을 치룬 것은 한국이 제왕적 대통령 시대를 급속히 청산해가는 모습과 함께 아직도 건재한 왕조시대의 기고만장한 ’사또‘들을 보여주는 듯해서다.

그의 자살도 그런 점에서 명암이 교차된다. 대통령도 법 앞에 평등함을 보여준 것 같기도 하지만 왕조 교체시의 잔인한 그림 같기도 해서다.

예를 들면 이성계가 집권하자 왕(王)씨들을 몰살하려들어 왕 씨들이 王자와 비슷한 全씨나 田씨로 개명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이다.

노무현은 정권을 재창출하지 못했으나 우리 역사의 왕조 청산과정은 이어졌다. 아니 이명박은 제왕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대통령이었다.

기업인 출신으로 ’경제대통령‘을 표방한 것이 우선 ’민주화‘를 곧잘 들먹이던 지금까지의 대통령들과는 달랐다.

여기에다 BBK의혹을 비롯해 전과 14범이라는 등의 너절한 소문만으로도 제왕과는 담을 쌓아야 했다.

경제대통령이라기보다는 어딘지 장사꾼 같은 그의 이미지도 그랬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수단 좋은 장사꾼 같고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악덕상인 같은 정도의 차이였을 뿐이다.

건설업자 출신인 그는 재직 중 4대강 사업의 공사감독 같은 역할에 바빠 임금노릇은 염두에도 없었다.

그가 장사꾼처럼 흥정에 능한 것도 권위를 내세우는 임금노릇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래 대운하를 내세웠던 그는 각계의 반대에 몰려도 ’진노‘하지 않고 꿩대신 닭 식으로 흥정해 4대강 사업을 관철시켰다.

그의 뒤를 박근혜가 이었을 때 사람들은 왕조의 청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큰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우선 여성이라는 부드러움이 그렇고 현대교육을 받은 그가 독재를 하다 비명에 간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배운 바가 있으리라는 기대에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준비된 제왕‘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제왕 준비라는 점에서 ’시해‘를 당한 그의 아버지도 능가했다.

박정희가 20대에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일본 천황에게 혈서를 쓰는 등 고생을 했다면 박근혜는 그 나이에 이미 중전마마 노릇을 한 셈이다.

그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범접하기도 어려울 만큼 서슬이 푸른 원로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즐겼으며 끝나면 이들로부터 90도의 절을 받는 수련을 쌓고 있었다.

그는 제왕의 필수적 기능인 진노(震怒)하는 법도 일찍 터득했다.

그가 1978년 자신이 총재로 있던 구국여성봉사단이 <새마음>이라는 기관지를 창간했을 때의 한 에피소드도 그렇다. 그는 청와대 정원에서 기자들과 다과를 들면서 자신이 창간한 잡지를 내놓고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한 기자가 다 좋지만 기사에서 <박근혜 총재님이 접하시고…>식의 극존칭은 좀 거슬린다고 말하자 박근혜는 벌떡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뒤 박근혜는 기자들과의 모임에서 그 기자의 말을 통렬히 반박했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비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분위기는 2015년 박근혜가 유승민의 ’배신의 정치‘를 비난한 것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박의 진노에 유승민은 당에서 쫓겨나는 등 수난을 당하지 않았던가. 그 진노가 부머랭이 돼 박근혜의 몰락에 일조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박근혜가 재위 중에 받았던 비난 가운데 상당부분은 왕이 대통령 노릇을 한 데서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불통(不通)‘ 시비도 그렇다. 왕이 왜 백성과 통해야 하는가. 왕은 하달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가 탄핵에 몰린 상황에서 검찰 수사를 받겠다고 했다가 시침뗀 것도 그렇다. 박근혜에게는 장부일언이 중천금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고 그것은 그가 장부가 아닌 여자여서라기보다도 제왕이어서라고 봐 줄 수는 없을까. 약속은 대등한 사람들끼리의 일이 아닌가.

따지고 보면 최순실도 눈치가 여우처럼 빠른 상궁 정도로 봐줄 수 있는 일 아닐까.

그 박근혜가 탄핵되자 신문들은 박정희 프레임의 종언이라고 썼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박근혜가 탄핵된 2일 뒤 조선일보는 <’박정희 시해‘ 김재규 묘소에 ’박근혜 파면 보도‘ 신문과 꽃다발 가득>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조선일보의 ’시해‘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정희 프레임은 무너졌지만 한국은 아직 왕조 시대를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일이다.

신문들의 ’시해‘ 사랑을 보면 불현 듯 1950년대의 박인수 사건이 떠오른다. 그는 한국판 카사노바로 수많은 여성들을 농락해 혼인빙자간음죄로 법정에 섰으나 법정은 “스스로 포기한 정조는 법으로도 지켜줄 수 없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고 판결했다.

그 판결문을 원용하자면 “국민 스스로 포기한 주권은 법으로도 지켜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더 장황하게 말하면 “보수신문이 앞장서고 주권을 지킨다는 진보신문들이 뒤따르며 내버린 주권은 단군도 예수도 보호할 수 없다. 물론 하늘나라에서 영세를 누리고 있는 영세교주 최태민도…”

2017.03.14.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