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627 [칼럼니스트] 2016년 12월 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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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우리들의 '황금공주님'
양평 梁平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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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을 지면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멜다 마르코스를 떠 올렸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는 그가 그처럼 대단한 사람인 줄은 모른 채 그저 선글래스를 눈 위쪽에 쓰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그 모습이 1979년의 10/26 당시 문상 온 이멜다가 장지에서 선글래스를 이마위에 걸친 모습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둘 다 얼굴이 두툼한 것도 그런 연상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연상은 곧 지워졌다. 둘 다 화제의 인물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두 사람의 출신이나 유명해진 경위가 너무 달라서였다.

그러던 이멜다의 모습이 요즘 또 다가왔다. 이번에는 최순실의 선글래스가 아니라 박근혜 때문이다.

최근 청문회가 박근혜의 ‘미용 청문회’가 되다시피 하자 이멜다의 “아름다워져야 할 의무”라는 말이 떠올라서다.

이멜다는 자신의 호화스러운 치장을 변명하면서 “궁핍한 필리핀 빈민들은 숭배할 수 있는 스타를 원하며 나는 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아름다워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명언을 남겼었다. 박근혜가 그 비슷한 말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자신의 그 초인적이고도 ‘거국적’인 미용 치성을 숨기려 하고 의원들은 그것을 캐려하는 바람에 ‘국정조사청문회’가 ‘박근혜 미용조사 청문회’처럼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드러난 사실들을 보면 박근혜는 나름대로 그 비슷한 ‘의무’나 ‘사명감’을 느끼고 분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보니 선글래스를 높이 쓴 그 두 여인들의 또 다른 공통점이 새삼 눈에 띈다. 둘 다 어딘지 박근혜의 멘토 같은 면이 있어서다. 이멜다는 10/26 당시의 방한 중 별도로 박근혜와 단 둘이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1시간가량 환담했으며 이멜다가 박근혜에게 남매들이랑 함께 필리핀을 방문해 달라는 덕담도 나눴다.

그로부터 7년 만에 자신이 쫓겨났던 판이니 그 호의는 실현되지 못했으나 이멜다의 그 말엔 너무 진정성이 비쳤다. 둘 다 동아시아에서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장기독재를 했다는 운명공동체같은 것이 있어서인지 나의 눈에는 친자매 같은 느낌을 주었다.

독재도 독재지만 그들은 유난스러운 퍼스트레이디로써 토네이도 같은 치맛바람을 날린 점에서도 너무 닮았다.

따라서 이멜다가 일일이 ‘아름다워져야 할 의무’를 가르치지 않아도 박근혜는 그런 것을 느꼈을 것이나 10/26 직후의 그 시점에서는 일단 그런 의무를 벗어나게 돼 시원섭섭했을 것만 같다.

한편 최순실의 경우 박근혜의 대통령 노릇에서부터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멘토로 활약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최근의 ‘미용청문회’에서 오간 한심한 이야기들은 최순실의 작품이라 단언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멜다는 ‘아름다워져야 할 의무’라는 철학을 제시했고 최순실은 그것을 실천한 셈이다. 물론 그것은 바탕이 잘못된 철학이었다. 아니 철학이랄 수도 없었다.

동양에는 孔子 老子 孟子 등 제자백가가 있었다지만 ‘狂子’는 없었다. 서양의 ‘Philosophy’도 ‘지혜(sophy)’를 ‘사랑(philo)’하는 것이지 미친 짓거리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철학은커녕 현실적으로도 너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이멜다의 모습만 봐도 그런 의무는 너무 살인적이다.

10/26 당시 그의 모습은 한국 시골 장터의 인심 좋은 국밥집 아줌마 같았다. 무식한 나는 당시 이멜다가 준 미스 필리핀 출신이라는 것을 몰랐었고 그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알았더라면 필리핀 국민들의 미인관을 우습게 본 나머지 필리핀 자체를 깔봤을지 모른다. 젊었을 때도 미스 필리핀이 아니라 준 미스 필리핀에 머물렀던 이멜다는 왜 아름다워져야 할 의무를 다른 여성에게 맡기고 편히 살지 못했을까.

더욱이 나이가 들어 ‘평균 이하’의 용모가 된 뒤에도 왜 그 벅찬 의무에 시달렸을까.

그것을 보면 중국 늙은 후궁들의 구구한 ‘장한가(長恨歌)’들을 떠올리게 한다. 젊었을 때야 물론 아름다워서 궁에 들어왔으나 어느덧 머리에 서리가 와 황제는 그 존재도 잊은 지 오래인데도 그들은 오늘도 내일도 황상을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가꾸고 있는 눈물겨운 정경을 그린 시들이다.

이멜다가 아름다워져야 할 의무 대신에 마음씨 후덕한 국밥집 아줌마의 의무 같은 데 충실했더라면 필리핀도 그 자신도 행복했을 터인데….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다. 특히 독재국가에서 미인 소리를 듣고 출발한 퍼스트레이디가 온갖 현란한 아첨의 미궁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운명적으로 불가능한 셈이다.

나는 그것을 박근혜의 경우를 통해서 촌탁(寸度)한 느낌이었다.

박근혜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쏟은 찬사야 알 길이 없었으나 매스컴에 비친 기사만으로도 짐작은 됐다.

박근혜의 해외나들이를 다룬 기사에서 곧잘 그가 무슨 차림을 했다는 대목들이 그렇다. 그가 양장을 하면 아프로디테나 클레오파트라가 따로 없고 동양식 패션을 하면 영락없는 서시(西施)였다.

그런 판이니 청와대의 주변 사람들이나 박사모의 세계에서 박근혜는 어쩔 수 없이 미의 화신으로 의무를 다해야 할 판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최근의 청문회를 보면 단순한 ‘아름다워질 의무’를 떠나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떠올린다.

물론 대통령인 박근혜는 사전적 의미의 경국지색은 될 수 없다. 경국지색이라면 양귀비처럼 군주의 마음을 빼앗음으로써 나라를 기울게 한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경국지색’이라는 말은 그들이 벌이는 ‘사랑행각’과 나란히 그들이 벌이는 ‘사치행각’의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아니 그런 사치 행각으로 나라를 기울게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경국지색이 아니라 그저 절세미인 정도로 끝나는 것이다.

주(周)나라 유왕(幽王)의 포사(褒姒)가 그 대표적인 경국지색으로 좀체 웃지 않는 그가 비단을 찢는 소리를 들으면 웃어 매일 비단을 찢었다는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에 “역시 중국은 대국이어서 대포도 대단하다”며 기가 죽었던 나는 최근 기가 좀 살아난 기분이었다.

박근혜가 국내외 여행을 할 때면 곧잘 화장실 변기를 바꾼다는 말을 들어서다. 그 말에 이멜다가 2000켤레의 구두를 두고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경제 후진국인 필리핀에게 느꼈던 야릇한 콤플렉스도 사라졌다.

비단 값과 변기 값은 어느 것이 더 비쌀까. 천학비재한 내가 알 리 없다. 다만 이제 중국인들 앞에서 기가 죽지 않을 자신은 생긴다.

적어도 그것은 중국의 대표적 경국지색인 양귀비가 썼다는 황금요강은 제압할 수 있다. 황금요강이 변기 값보다 더 비쌀지는 몰라도 그건 한 번 만들면 반영구적으로 쓰는 내구제고 박근혜의 변기는 화장지와 더불어 비내구제로 쓰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화장실이 없는 곳에 화장실을 설치하기 위해 수도공사를 했다던가 해외여행 중 객실을 뜯어고치다시피 했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가 뒷받침하고 있다.

그래서 ‘외교’보다 ‘외모’에만 신경을 썼다는 비난을 하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시바의 여왕이나 클레오파트라의 미소가 얼마나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모르는 무지렁이들의 군소리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박근혜가 기회만 되면 해외로 나가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보여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래서 비아그라를 복용하면서까지 아프리카의 고산지역 국가들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박근혜의 4년이 역사상 꼴찌를 기록한 것은 최순실이라는 엉터리 국사(國師)에 앞서 이멜다라는 멘토의 ‘아름다워져야 할 의무’라는 가르침이 잘못돼서인 것만 같다.

그 의무는 이멜다의 경우도 부당하지만 박근혜의 경우는 아예 논할 것도 없다. 우선 박근혜는 준 미스코리아가 아니지 않는가. 준 미스 필리핀도 나이가 드니 국밥집 아줌마 모습이었는데 그나마도 아닌 박근혜가 아름다워질 의무는 처음부터 너무 벅찬 것이다.

그런 공백을 필리핀보다 더 정교하고 세련된 주위 사람들의 ‘찬사’로 메꿀 수는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멜다는 퍼스트레이디고 박근혜는 대통령으로 너무 많은 의무를 짊어져야 할 처지였다.

이를테면 ‘필리핀 판 세월호 사건’이 났다고 가정할 때 이멜다가 7시간이 아니라 14시간동안 미용수술을 하거나 굿을 해도 그처럼 요란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근혜를 아름답다고 추켜대는 척 그에게 감당못할 짐을 지운 측근들은 지금도 어리석은 꼼수만 강구하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용비어천가를 지어낸 한국인의 재능은 때로 망국적 재능으로도 통한다.

- 2016.12.19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