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24 [칼럼니스트] 제1607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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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괴롭히는 ‘국민의 이름으로’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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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명구만 모아서 집중적으로 읽는 시간이었다. ‘탁위인언 음제기의(托爲人言 陰濟己意)’라는 대목이 나오자 강사와 수강생 모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 말이라 핑계대면서 몰래 자기 이익을 챙긴다’는 뜻인데 이구동성으로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을 지칭했다. 진실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다수 의원들은 ‘모진 X 옆에 있다 벼락 맞는다’는 격으로 억울하겠지만 국회의원과 정치인 이미지가 대체로 그렇다.

선조 18년(1585년) 6월 정여립 역모사건이 나자 의주목사 서익(1542-1587)이 죄인의 편지에서 거론된 인물들의 연루설을 제기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대해 사간 이양중(1549-1592) 등이 차자를 올려 ‘서익이 사람들 말이라고 칭탁하여 음흉하게 제 뜻을 이룬다(托爲人言 陰濟私意)’고 지적했다. 아직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사람들 말이라 핑계대면서 자기 이익만 도모한다고 반박한 것이다.

 이처럼 공론을 빙자하여 사익을 챙기는 행태를 경계하는 말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명종 13년(1558년) 1월에도 경연에서 심연원(沈連源, 1491-1558)이 ‘공론이라 핑계하고 몰래 사사(私事)를 성취하는(假托公論 陰濟己私)’ 사람으로 김규 등을 지목했다. 공론 핑계를 늘 경계했지만 근절되지 않기 때문에 자주 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입만 열면 ‘국민을 위해서’라면서 갖가지로 국민을 괴롭히는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에 대해 짜증난 사람들이 많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이를 입증한다. 명분도 시원찮은 일로 싸워 국민을 피곤하게 하다가도 세비문제만 나오면 여야, 보수 진보 구분 없이 슬그머니 담합하는 지질한 행태, 수많은 특권을 내려놓고 국민 앞에 겸손해지겠다는 약속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입 싹 씻는 철면피한 모습에 국민은 지쳤다.

최근 충청지역 인구가 호남지역을 앞선 것을 계기로 국회의원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에도 어김없이 국민이나 지역주민 의견이라는 핑계를 내세운다. 그러면서 아예 이참에 국회의원 전체 수를 줄이라는 여론은 국민 속에 포함시키지도 않는다.

충청지역 인구는 수도권 인구가 주로 유입돼 늘었다. 그렇다고 수도권 의원 수를 줄이자는 말은 없다. 그럴 바엔 현재 충청인구 대비 의원 수에 맞춰 다른 지역도 줄이자는 말이 나오는데 왜 그건 고려하지 않는가.

그렇게 하면 수도권 등 인구밀집 지역은 오히려 늘려야 한다는 계산도 나온다. 따라서 아예 선거구를 재조정해 전체 의원수를 줄이라는 요구가 많다. 이런 식의 의원이라면 한 명이라도 줄여 국민고통을 덜어달라는 말이다.

세칭 종북파 의원 및 정치인들도 국민을 입에 달고 살면서, 국민을 괴롭히는 대표적 집단이다. 자기들 때문에 지친 국민의 피로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도리어 짜증을 돋운다.

‘어리석은 대중’이 자신들의 충정을 몰라서 그렇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면 ‘똑똑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당신들’이 좀 알아듣게 설명, ‘어리석은’ 국민을 이해시켜 보라. 그럴 능력이 없으면 국민의 이름을 더 이상 팔지 말아야 할 것이다.

툭하면 국민의 이름으로 과격한 파업을 벌여 국민을 인질로 삼고, 괴롭히는 일부 강성 노조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진심을 국민이 모른다고 탓하지 말고, 더욱 성실한 태도로 국민에게 다가가 진면목을 보여 달라. 그리고 이후 판단은 국민에게 맡기라.

소시민은 대체로 자기 앞가림도 힘들어 허덕거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자기 혼자 사는 것도 힘들기만 하다.

이런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이끌고 도우면서 함께 살아가겠다고 하는 ‘고마운’ 이들이 정치가, 운동권 인사, 공직자 등이다. 한마디로 개인의 사욕은 뒷전으로 미루고 공익을 앞세우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와 정반대 행태를 보이며 국민을 괴롭힌다. 이를 근절하는 방법은 없을까.

영조 때 유수원 (1694-1755)은 그의 저서 ‘우서(迂書)’에서 이렇게 말했다. “벌판에서 사냥 할 때 죽을힘을 다해 짐승을 쫓다가 한 사람이 그 토끼를 잡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만두는 것은 그로써 분수(分數)가 정해졌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흔쾌히 승복하라는 것이다. 원칙 밖에서 사리를 추구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관직의 자격을 엄격히 정하고, 요행으로 얻지 못하게 하면 청탁과 비리가 저절로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되면 공론은 기약하지 않아도 저절로 시행된다는 것이다. ‘탁위인언 음제기의’를 막는 방법이 철저한 원칙 준수와 엄정한 실행에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국민을 빙자해 국민을 괴롭히는 행태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일보 2013년 12월2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