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1 [칼럼니스트] 제1600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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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불과 발등의 불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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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에게 미치지 않은 일을 근심하는 것, 근심해야 할 것을 도리어 즐기는 것, 우환이 닥쳐도 이를 해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은 모두 화를 자초하는 일이니 이런 경우 반드시 우환이 닥치고야 맙니다”(夫弗及而憂 與可憂而樂 與憂而弗害 皆取憂之道也 憂必及之. 춘추좌전 노소공 원년)

BC 541년 중국 춘추시대 남쪽 강국 초나라가 패권을 노리며 무력으로 주변 10여 개 국을 동맹에 참여하도록 강요했다. 그 회합에 참여했던 정(鄭)나라 외교관 자우(子羽)가 다른 나라 사절들의 태도를 보고 분석한 말이다.

당시 초나라뿐만 아니라 진(晉), 진(秦), 제(齊)나라 등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 국가는 이에 대비하기는커녕 내분으로 자기 앞가림도 힘든 처지였다. 한 마디로 뭘 근심하고, 무엇부터 근심해야할지 모르는 나라들이 많았다.

자우의 경고는 2500년 전 그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 철종 12년(1861년) 1월 수도 한양에 피란 인파가 속출하고, 서울을 떠나 낙향하는 관료들까지 있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 북경이 영. 불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문이었다. 청나라가 서양세력에 침공당한 것은 조정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혼란에 빠질 정도의 당연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대응은 한심했다.

사학자 하정식교수의 저서 ‘태평천국과 조선왕조’(지식산업사)에 따르면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 신석우(1805-1865)는 청나라 황제 함풍제가 북경에서 열하로 피난 간 것을 정례적인 수렵행차라고 철종에게 보고했다. 나라와 백성의 충격을 줄인다는 미명하에 정보를 왜곡한 것이다.

신석우가 어리석거나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당시 세도정권이 그렇게 만들었다. 1851년 홍수전이 난을 일으키고 남경에 태평천국을 건국했을 때부터 이미 정보는 세도정권의 입맛에 맞도록 가공되어 임금께 보고되었다. 철종은 더 정확하고 상세한 상황을 알고 싶어 했지만 실상은 그렇게 가려졌다.

태평천국의 난은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제 1차 아편전쟁 등으로 극심한 민생고에 시달리던 민중혁명으로 청나라 말기의 각종 사회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조선도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등 체제붕괴 조짐이 곳곳에서 발생하던 때였다.

그러나 세도정권은 자기네 정권안보에 급급, 이런 사안들을 애써 외면하며 정적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1849년 헌종이 후계자 없이 죽자 종실의 유능한 왕손이 임금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강화도의 평범한 농사꾼 철종을 옹립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후계자 영순위로 거론되던 이하전, 이하응(흥선대원군)을 철저히 견제 하다 못해 1862년 이하전을 역모혐의로 죽이기까지 했다.

조선은 청나라가 사실상 국제무대 자체였고, 해외정보는 청나라에 가는 사절단의 보고가 전부였다. 그것도 청나라 관변의 공식 문서 등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본, 유구 등은 이외에도 더 생생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는데, 우리는 그 정보마저 세도정권 안보를 위해 왜곡하여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자우(子羽)가 경고한 세 가지 경우보다 더 한심한 상황이었으니 망국의 길로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임진왜란과 6.25 때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사전 정보도 부족했지만 그나마도 정확하게 읽고 처리하는 지혜를 발휘하지 못해 국난을 겪은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주변 정세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국을 강점했던 일본은 또 미국을 업고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 하며, 중국은 과거의 치욕을 다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강력하게 대치하고 있다. 외세가 밀어닥치던 조선왕조 말기보다 더 심각하면 심각했지 나을 게 없는 상황이다. 그때와 달리 분단의 고통과 북한의 위협까지 가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부로는 국가정보원, 검찰 등이 분란에 싸여 나라의 안보가 흔들리고, 정치권은 국익보다 당리당략에 사로 잡혀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런 때 으레 따르기 마련인 부정, 부패는 근절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나라가 근심할 것을 제대로 근심하고, 그것도 차분히 우선순위에 따라 근심하는지 국민은 미덥지 않다. ‘강 건너 불’인지 ‘발등의 불’인지를 정확히 읽고 헤아려, 사회와 국민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이 정치판을 걱정하는 판국이니 이야말로 근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국민일보 2013년 11월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