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29 [칼럼니스트] 제1599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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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치매와 한문학습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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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글방선생님 한 분은 강독시간에 자신의 설명을 메모하면 못마땅해 하신다. 그러면 공부가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학교시절 선생님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중요한 대목 메모하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겨온 수강생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수업태도 불량한 학생처럼 손 놓고 있으라는 말씀은 아닐 테고...

들은 대로 무조건 외우라는 것이다. 사전도 찾지 말라고 하신다. 예컨대 10개를 외우면 머릿속에 1, 2개는 남지만, 사전 찾아 버릇하면 시간은 몇 배 들어도 남는 것은 극히 적다는 논리다.

한 마디로 부교재 전혀 없이 책 한권 달랑 들고 외우라는데 산골 외딴 집 아니면 감옥, 그것도 독방에서나 가능할 노릇이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전근대적 방법에 어이없어 하면 ‘내가 한 말이 아니고 조선조 성호 이익이 강조했던 것’이라며 슬쩍 늦추신다.

그런 이익도 책의 여백에 메모하거나, 별도의 공책에 적어 두는 질서(疾書.어떤 생각이 달아나기 전에 빨리 적어 두는 것)를 즐겼고, 다른 학자들도 이 방법을 애호했다. 이 메모들만 모아서 책을 내기도 했다. ‘총명불여둔필’(聰明不如鈍筆. 총명이 무딘 붓만 못하다)이란 속담 역시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그때그때 적어 둘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말들을 상기시켜 드리면, 한문이라는 외국어 학습을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 일반 독서에서 필요한 메모를 금하는 것은 아니라며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어찌할꼬하는 표정을 감추시지 않는다. 영어를 비롯한 각 외국어 학습도 그게 최상임을 강조하시며 미국에 사는 선생님 친구를 예로 들었다.

그 교민은 어느 날부터 한문 삼국지를 읽기로 했다. 내용은 대강 아니까 웬만하면 읽을 줄 알았는데 막상 책을 펴니 모르는 곳이 너무 많아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부근 중국인교포한테 물어도 모르고, 사전도 없고...

하는 수 없이 무조건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되풀이하니 결국 통하더라는 것이다. 이른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 같은 책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으면 저절로 뜻을 알게 됨)이다. 그 분은 그 방법으로 자치통감 등 여러 한문 서적을 자유자재로 읽게 되었다.

그런 자세로 공부하라는 것인데 우리들로서는 ‘너무 먼 당신’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지만 선생님 논어강의를 들으면, 거짓말 같은 사실이 눈앞에 펼쳐지니 어이없어 하면서도 믿지 않을 수 없다.

논어시간에 선생님은 책 없이 맨손으로 들어오신다. 본문은 물론 주석까지 다 암송하고 계시니까 교재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텍스트 내용을 자세히 풀이하고, 여러 학자 견해를 다양하게 소개하니 수강생들은 놀라움을 넘어 질리고 만다.

주변에 누군가 영문 또는 한글로 된 책을 한 권 몽땅 외우는 사람이 있다고 가상해보자. 그러면 우리 글방 수강생들이 놀라는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서당에서는 논어 500독, 맹자 100독 이런 식으로 소리 내서 읽기를 권장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그런데 그걸 넘어 무조건 외워야 한다고 강조하시니 마음이 무겁고 아득할 뿐이다.

그 원칙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두뇌를 활용하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디지털치매 예방에 좋은 방법일 것이라는 점에도 120% 동의한다. 선생님 말씀대로 논어를 거의 다 외우는 이도 있고, 당시(唐詩)를 비롯 한시를 100편 넘게 암송하는 사람도 있다. 논어, 맹자는 물론 시경, 서경 등을 몇 백번씩 성독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해 메모하고 사전 찾는 것은 물론 전자사전이나 스마트폰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 없으면 가족전화번호도 더듬고, 노래방기기 없으면 유행가 가사도 모르는 디지털 건망증을 걱정한다. 뇌를 많이 활용해야 이를 방지한다는 걸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디지털은 두뇌기능과 기억용량을 확장하여 인간의 경험과 지식, 상상력을 거의 무한대로 활용하고 있다. 그 긍정적인 면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부작용 또한 만만찮다.

따라서 우악스럽기(?) 그지없는 한문학습방법을 일상생활에 일부 차용, 뇌의 활용도를 높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한문뿐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영문이나 다른 외국어, 또는 한글 문장을 몽땅 외어보려는 노력도 괜찮으리라 본다. 그러면 머리가 모자 쓰고, 물동이 이며, 헤딩할 때 밖에는 쓸모없는 단순도구로 전락하는 사태를 상당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일보 2013년 10월2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