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26 [칼럼니스트] 1594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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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사건2 - 전태일 분신
우혜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hazelwoo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시장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근로기준법 책을 끼고 분신하기 넉 달 전 일기에 쓴 글이다. 1970년 11월 13일 젊은 재단사 22살의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3만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 개선을 촉구하다 어머니 이소선에게 이 일을 계속해 줄 것과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한 뒤 사망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조영래 저 전태일 평전(2009년 신판 1쇄, 돌베개)을 비롯하여 각 종 자료를 읽고 나는 비로소 불쌍한 내형제, 어린 동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시다, 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옷만드는 일의 보조로 실밥을 뜯거나 하면서 평화시장에서 일하고 있던 발육이 덜된 어린이 노동자였다.

사실 재단사는 의복제조 과정에서 가장 기술이 요구되는 직종으로 요즘 말로 하면 팀장에 가깝다. 그 아래 미싱사, 시다가 재단사가 옷감을 재단하면 그 때 일을 한다. 전태일이 그냥 당시 재단사로서 월급 받고 자신과 함께 일하는 어린 노동자 동생들 딱한 사정을 그냥 외면했다면, 지금 살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태일은 16세 때 평화시장에 시다로 들어와 일을 하기 시작했고, 미싱사를 거쳐, 재단사가 되었다. 경력이 6년이었다. 그는 미싱사, 시다에게 친절하였다고 한다.

분신 전 당시 전태일이 노동청장 앞으로 보냈던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근로조건 개선진정’에 따르면 대부분 남자인 재단사 1천2백 명은 임금이 월 3만원, 전체가 여성인 미싱사 1만2천명은 월 1만5천원, 나이 어린 소녀 시다는 13세부터 17세로 1만 2천명이 월 3천원으로 나와 있다. 사람들은 당시 차 한 잔 값이 50원으로 시다 일당이 50원이었다고들 말했다.  

그러나 가장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일은 어린 소녀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오랜 시간 일하느라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리라. 야간작업을 위해 잠 안 오는 주사를 맞고 사흘 야간작업을 한 뒤 눈만 멀뚱멀뚱 석상처럼 앉아서 손을 놀리지 못하는 시다를 보고, 그의 일을 대신해주면서 위로의 말을 던지고, 피를 토한 여공을 데리고 병원 문을 두드린 전태일. 자신의 차비로 배고픈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 먹이고 자신은 걸어 다녔던 전태일. 그로서는 1.6 미터의 먼지구덩이 작업 공간에서 밤새 일을 해야 하는 어린 동생 시다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 때 유관순이 갇혔던 서대문형무소에 가보면 자신의 키보다 작게 감옥을 만들어 그 안에서 지내게 했다고 한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들어오기 전에도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등으로 돈을 벌어 동생들과 부모를 먹여 살려야 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희한한 일은 학력이 초등학교 중퇴인 전태일이 일기를 썼고 많은 기록을 글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근로감독관을 만났고, 노동청에 진정했고, 그러다 설문지 결과가 있으면 신문에 실어주기가 쉽다는 말에 설문지도 돌렸다. 그러나 전태일은 이 일로 이미 업계에서 찍혀 삼각산에서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 돌아온 것이다. 어린 동생들 곁으로. 죽을 결심을 하고. 그의 여동생은 살아남아 유학 가서 영문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제목이 They are not machine 이다.

-한성대신문 제480호 2013년 9월16일 발행
그 때 그 사건 두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