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7.28 [칼럼니스트] 제1588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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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漢詩가 외교석상에 자주 등장하나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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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박근혜대통령과 중국 시진핑주석이 만나는 자리에서 양국정상은 공자의 명언과 최치원의 시구를 주고받으며 우호를 다졌다. 몇 년 전 미국을 방문했던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도 이백, 두보 시를 인용하고, 중국을 방문했던 미국 클린턴국무장관은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말을 빌려 “산을 만나면 길을 만들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자”(逢山開道 遇水架橋)고 했다. 그밖에 프랑스, 대만 등 여러 나라 정치인들과 만났을 때도 한시나 중국 명언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이에 대해 이색적이라거나 중국정치인들의 한시 사랑이 유별나다는 등으로 많이들 풀이하고 있다. 또 시(특히 한시)가 갖고 있는 호소력과 의미의 다양성, 직설을 꺼리는 외교석상에 적합한 은유, 비유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중국의 문화현상으로 설명하는 견해도 많다.

그래도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도 시가 많은데 왜 하필 한시만 그리 자주 외교무대에 등장하느냐고 묻는다. 오늘날 시 개념으로만 보면 그런 질문이 나올 만도 하다.

한시외교 뿌리는 고대중국의 ‘시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주나라에서는 전국의 정치상황, 민생 등을 파악하기 위해 각 제후국 시를 채집해 정기적으로 천자에게 보고했다. 주남과 소남 그리고 13개 나라 시가 수록된 ‘국풍’이 그것이다.

시경은 그렇게 민심을 파악하는 바로미터였으므로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또 국가 간 외교에서 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의중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도구였다. 한 마디로 시경은 정치, 외교의 필수과목이었다.

공자는 이를 간명하게 설명했다. 아들한테 시를 배우라고 하면서 ‘시를 모르면 말을 할 수가 없다(不學詩 無以言. 논어 계씨편 13장)’고 했다. 말을 제대로 할 줄 모르면 자기 의사 전달은커녕 남의 말귀도 알아들을 수 없다. 이처럼 소통이 안 되는데 정치를 어찌 할 것인가.

그러나 ‘<시경>의 시 3백편을 다 외우더라도 정무를 잘 해내지 못하고, 각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혼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많이 외운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 논어. 자로편 제5장)라고 했다. 시경을 완전히 소화하여 자유자재로 활용, 외교석상에서 자기나라 의사를 전달하고 상대국 의도를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시를 모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한 것이다.

춘추시대(BC770-476년)는 전국시대(BC475-221년)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가장 다양한 사상과 주장이 난무하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럴 때 시가 외교석상의 중요한 매체였으니 그 중요성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노나라 정공 4년(BC506년) 오자서가 이끄는 오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침략, 수도가 함락되고 국가 존망여부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오자서는 본래 초나라 사람인데 국외로 망명, 자기 조국에 복수하러 온 것이다. 당시 초 대부 신포서는 본래 오자서와 친구였으나 이제는 적으로 갈라져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秦)나라로 가서 원병을 요청했다. 초를 구해주면 대대로 진을 섬기겠다는 신포서의 간절한 애원에도 진 애공은 조정 대신과 의논해 보겠다며 잠시 객관에서  쉬라고 했다. 사실상 거절이었다.

신포서는 “우리 임금은 피난 가시어 쉴 곳도 정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신하된 제가 어찌 감히 휴식을 취하겠습니까?”하며 궁궐 담에 기대어 7일 동안 밤낮으로 통곡했다. 물도 마시지 않았다. 감동한 진 애공이 시경 진풍(秦風) 가운데 무의(無衣)시를 읊었다.(唐風’의 무의시도 있으나 이와 다름). 이에 신포서는 아홉 번 절하고 감사의 뜻을 올렸다.

그 시의 3절 가운데 1절은 이렇다. ‘어찌 옷이 없다 하리요. 그대와 두루마기를 함께 입으리. 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시면, 나는 긴 창과 짧은 창날을 세워, 함께 원수를 치리다’(豈曰無衣 與子同袍 王于興師 脩我戈矛 與子同仇) 이어 진의 군대가 출동, 초나라를 구했다.

‘춘추좌전’에는 첨예하게 대립하거나 민감한 사안으로 날이 서 있던 국가 간 외교석상에서 시로써 의사를 전달했던 기사가 많이 나온다. 이 같은 기능과 역할이 한시의 특성을 이루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중국과 고려, 조선의 과거시험에 시가 필수과목이 된 것이나, 옛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늘 시를 접하고 짓던 관행도 같은 맥락이다. 한시는 외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대화 기능을 했다. 중국의 상대국들이 이런 역사적 특성과 현상을 감안하기 때문에 외교석상에서 한시가 한몫 한 것이다.

-국민일보 2013년 7월1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