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71 [칼럼니스트] 2012년 3월 1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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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에 열광하는 대한민국 사람들

이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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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지 않은 물건은 아름답지 않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사회평론가인 베블런(Thorstein Bunde Veblen)이 1899년에 쓴 《유한계급론(有閑階級論)》에서 한 말이다. 참으로 명품족들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이런 말을 한 베블런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품족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자신의 과시욕이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고가의 물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질이 아무리 좋아도 값이 싸면 외면한다. 값이 비쌀수록 구매욕을 불태우는 것이 바로 명품족이다. 베블런은 그의 저서에서 “상류층 소비자들에게는 값이 비쌀수록 호사품의 가치는 커진다”고 주장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베블런효과(Veblen Effect)'라고 말한다.  

명품족은 호사스러움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많은 돈을 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어서는 안 되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남에게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린다. 이들은 값비싼 명품은 선호하지만, 값이 떨어지면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구매를 기피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두고 ‘차별화(Distinction)’라고 불렀다. 다른 말로 하면 티내기 또는 구별짓기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명품은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와의 차별화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주 많이 가진 자가 약간 많이 가진 자와의 차별화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서강대 원용진 교수는 “양반이나 귀족 등 제도화된 계층이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브랜드는 소비자들에게 다른 사람과의 차별을 부추겨 계층적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하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일상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남을 평가할 때 종교나 가치관, 정치적 견해보다는 사용하는 제품의 브랜드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습성을 갖고 있다. 이것도 결국은 명품을 기준으로 한 계급차별화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경제적 능력과 관계없이 너도나도 명품구매에 열을 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태인지도 모르겠다.  

주변을 살펴보면 명품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게 된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 들고 있는 가방, 차고 있는 시계는 대부분 값비싼 외제이다. 브랜드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처음 들어보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남들이 명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한마디 해주면 대단히 기뻐한다. 자신이 의도했던 ‘티내기’가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경험할 때도 있다. 누가 값비싼 옷을 입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명품임을 알아보고 감탄하면 장본인은 여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명품을 알아보는 안목이 대단하다”며 찬사를 던진다. 이때는 둘 모두가 오만해지기 쉽다. 명품을 입은 사실에 오만해지고, 이를 알아본 사실에 오만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명품을 갖는 행위를 두고 사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1883~1971)은 “사치의 반대는 가난이 아니라 바로 비천함”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명품족이 값비싼 제품을 찾는 것은 비천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내외의 유명 메이커들은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구매력이 높은 일부 고객만을 겨냥한 ‘초고가 마케팅’ 전략을 펼치고 있다. 비싼 값으로 명품족의 구매욕을 자극하는 수법이다. 특히 우리라에 진출한 해외 명품메이커들은 다른 나라에서보다 2~3배나 비싼 값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툭하면 가격을 올리는 횡포를 부리고 있다. 그래도 찾는 사람들이 많으니 잘못 돼도 여간 잘못 된 게 아니다.  

명품족들은 이들의 전략에 현혹된 나머지 온갖 고급 브랜드로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고는 마치 자신이 ‘귀족’이나 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유명 메이커의 의류나 신발을 갖고 있지 않으면 왕따를 당할 정도라고 한다. ‘사태’가 이처럼 심각하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으니 걱정이다.  

그러다보니 ‘짝퉁’이라고 불리는 모조품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럭셔리 신드롬》의 저자 제임스 트위첼(James B. Twitchell) 교수(미국 플로리다 대학)는 “모조품은 일시적으로는 진품에 누를 끼칠지도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진품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고 말했다. 짝퉁은 명성이 있는 제품에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품점들은 모조품을 방관하거나 조장하기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상당수 해외 유명 브랜드는 한국 때문에 먹고산다는 말이 있다. 회사가 망해가다가도 한국에 진출하면서 고가작전을 펼친 덕분에 엄청난 이득을 올려 기사회생했다는 보도도 자주 접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명품에 열광하는 한국 사람들의 유별난 심리를 십분 악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유독 한국에서만 초고가 마케팅을 벌이면서 “우리에게 불황은 없다”고 큰소리(?) 치는 명품 메이커들. 명품열풍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유명 브랜드 제품을 한 가지라도 손에 쥐려는 한국 사람들. 많은 이익을 올리는 것이 기업의 생리이고, 좋은 것을 가지려는 심리가 아무리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도 지나친 것만은 사실이다.

뜨거운 것이 지나치면 데이는 법. 이대로 가다가는 가정경제뿐만 아니라 국가경제까지 어려움을 겪게 될 지도 모르겠다. “소비가 미덕”이라거나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도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소비행태에 대한 균형감각이 아닐까. 자신의 분에 맞는 소비생활을 할 때라야 우리 사회의 맹목적인 명품선호풍조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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