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65 [칼럼니스트] 2011년 10월 1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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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엉터리 존댓말

이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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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담배 계세요?” 오래 전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갔을 때 담배를 사면서 자주 써먹었던 말이다. 지난 날 필자가 농담으로 했던 이 같은 표현법이 요즘 들어 실생활에서 예사로 쓰이고 있다. 백화점이나 마트, 식당, 은행, 병원, 관공서, 학교 등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손님이 찾으시는 상품은 여기에 있으세요”(백화점), “이거 신상품이세요”(옷가게), “가격은 적절하십니다”(마트), “주문하신 음식 나오셨습니다."(식당), “이 자리가 시원하십니다.”(카페), “엑스레이 촬영하시겠습니다.”(병원), “제가 도와드리실께요”(은행), “선생님이 너 오시래.”(학교)

우리말 파괴하는 변종 존댓말 열풍

이런 현상은 TV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오락프로를 보면 출연자들이 아무에게나, 아무 것에나 존댓말을 붙이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가 “사인회에서 어리신 팬 분들이 너무 좋아하시더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개그맨은 70대 할아버지에게 20대 유명 여가수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아시느냐”라고 묻기도 한다. “내가 하시는 것 보셨죠?”라고 말하는 중견 탤런트도 있을 정도이다.

이보다 훨씬 심한 경우도 있다. 얼마 전, 뉴스시간에 방송 기자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검거된 사람에게 “왜, 사람을 죽이셨어요?”라고 묻는 것을 봤을 때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누구보다 정확한 어법을 구사해야 할 방송 기자까지 그러니 그야말로 '어이상실'이다. 이제는 국민 모두가 앞 다투어 그럴 만큼 우리사회에 변종 존댓말 열풍이 불고 있다.

“~하신다”는 말과 함께 유행하고 있는 것이 “~분”이라는 표현법이다. 지인 분, 아내 분, 가족 분, 매니저 분, 팬 분 등 사람에게는 한결같이 ‘분’이라는 의존명사를 붙인다. 그래야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일어나셔서 세수하시고 밖에 나가셨다”는 식으로 이중 존댓말도 모자라 삼중 존댓말까지 쓰고 있으니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잘못된 표현, 방송사에서는 자막으로 소개까지

이처럼 우리말을 흔들고 있는 엉터리 존댓말은 악성 바이러스처럼 변종에 변종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모든 물건을 ‘물건 님’이나 ‘물건 분’이라고 부르고, 말끝마다 존댓말을 붙여야 어법에 맞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존댓말이 미쳐 날뛰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 같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TV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엉터리 존댓말의 발원지는 TV 방송사라는 얘기이다. 어떤 기자는 칼럼에서 “엉터리 존대법, TV의 책임이세요”라는 제목으로 꼬집기도 했다.

연예인들이 TV 프로에서 잘못된 존댓말을 쓸 경우 방송사 측은 이를 지적하고 고쳐주기는커녕 그들이 한 말을 자막으로 내보내기까지 한다. 바로 잡는 게 아니라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TV 연속극에서도 이런 유형의 대사를 들을 수 있으니 언어 순화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요컨대 연예인과 TV 방송사의 합작품인 과잉 존대법, 변종 존대법이 시청자들에게 여과 없이 전파됨으로써 우리 사회 전반에 전염병처럼 번지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올바른 존대법 쓰기 위한 노력 기울여야

더 큰 문제는 ‘원죄’를 지은 방송사에서 이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늦기 전에 존댓말 바로 쓰기를 위한 공개 토론회를 열거나 기획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녹화에 들어가기 전에 출연자들에게 잘못된 어법을 쓰지 않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2011년 10월 9일은 565번째 맞는 한글날이다. 언어 파괴가 사이버공간에 이어 현실 세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세종대왕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후손으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모두가 오늘날의 현실을 크게 반성하고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말, 우리글을 보다 잘 가꾸고 다듬는 데 힘써야 하겠다.
-국민대신문 20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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