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샤리 혁명'과 한국의 민주항쟁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튀니지의 '재스민(Jasmine)혁명'에 이은 이집트 '코샤리(Koshary)혁명'의 민주화 열풍은 예멘과 시리아 등 아랍 세계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두 혁명의 명칭이 함축하듯 재스민은 튀니지의 나라꽃이고, 코샤리는 이집트 서민층의 전통음식으로 시민에 의한 민주화 열망의 개가다. 24년 간 장기 집권을 해온 튀니지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했고, 이집트 무바라크의 '30년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코샤리 혁명은 무바라크의 퇴출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만이 분명 할 뿐 극심한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민주화 열망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정권을 이양 받은 군부가 대선과 총선을 안전하게 치러 민간정부 탄생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이 이행되기까지는 정치적 역학관계와 외부입김 등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도 '박정희 시대'를 마감한 뒤에도 민주적인 사회가 정착되기까지 5·18광주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이라는 희생을 치렀고 전두환 철권 통치를 겪어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코샤리 혁명을 지켜보면서 떠올리게 하는 한국의 선례는 1960년 4.19혁명이다. 자유당의 독재정치와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국민들이 일으킨 민주화혁명이다. 그 해 4월 11일 마산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 된 게 도화선이 됐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하야한 뒤 하와이로 망명하고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면서 제2공화국을 탄생시키는 단초가 됐다. 4월 혁명은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민주화 꽃을 미처 피워보지 못한 채 좌절됨으로써 백낙청 교수의 주장대로 '미완의 혁명'으로 남았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은 4.19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군부 독재에 항거한 시민운동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불안한 정국을 틈타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등장했고 군사통치시대로 회귀되었다. 이듬해 5월 15일 서울역에 모인 전국학생연대 대규모 민주항쟁 시위를 빌미로 이틀 뒤 비상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5월 18일 "계엄 철폐" "휴교령 철폐"를 외치며 광주 금남로에 진출한 학생들에게 계엄군은 총격을 가했다. 무자비한 학살은 무고한 어린 학생, 부녀자, 시민까지 무차별하게 자행 됐다. 당시 언론현장에 몸담고 있었지만 취재통제와 언론 사전 검열, 외부인의 접근 차단으로 비극의 현장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고 유언비어가 난무한 암흑시국이었다.
군부는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했고 이에 희생된 인명피해는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나 되는 끔찍한 참상이었다. 광주 희생자에 대한 보상과 희생자 묘역을 성역화 하면서 1990년대에 와서야 5.18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의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7년 6월 10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당시 석간으로 발행하던 K신문에 근무하면서 1판 마감을 끝낸 뒤 그 대열에 참여했다. 구름처럼 몰려든 시민들과 학생들은 "직선제 쟁취"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고, 함성은 도심을 뒤덮었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적 반발과 염증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20여 일간 전국적으로 500여 만 명이 참가한 6월 항쟁에 굴복한 정부는 직선제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 등이 담긴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변혁의 시대를 맞았다. '넥타이 부대'로 상징되는 중산층 시민들의 참여로 값진 열매를 맺은 '무혈혁명'이었다. 6월 민주항쟁은 민주화를 앞당기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정권은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주었다.
-국민대학보(2011.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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