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55 [칼럼니스트] 2011년 3월 1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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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과 표현의 자유

이재일 (칼럼니스트)
http://columnist.org/netporter


“On the Internet nobody knows you're a dog.(인터넷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개라는 사실을 모른다.)” 아마도 인터넷의 속성과 관련해서 이처럼 핵심을 찌른 경구도 없을 것 같다. 이 말은 인터넷시대 최고의 잠언(箴言)으로 꼽히고 있다.

이 독특한 문장은 미국의 만화가 피터 스타이너라는 사람이 미국의 주간지 ‘뉴요커’ 1993년 6월5일자에 게재한 만화에서 맨 처음 사용했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은 개가 다른 개에게 바로 이 말을 하는 모습을 그렸다. 스타이너가 왜 이런 만화를 그렸을까. 인터넷의 특성인 익명성과 모호성이 갖는 부정적인 현상을 꼬집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의 통찰력이 정말로 예리하다.

익명성과 비대면성이라는 특성을 안고 있는 인터넷에서는 서로 대화하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설사 이쪽의 정체가 인간이 아닌 개라고 할지라도 자판을 두드릴 줄만 알면 (그렇게 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상대방은 인격체를 가진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타이너가 만화에서 말한 것처럼 얼굴이 안 보이는데 상대방이 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온라인에서는 오프라인에서의 자아와는 다른 성격의 다중자아(多衆自我)가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네티즌들은 수많은 정체성을 만들어가면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댓글을 달고 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을 개진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 인터넷이다.

문제는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표현하다보면 상대방과 충돌하게 되고 급기야는 폭력성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예사롭게 비난의 말을 퍼붓고, 심지어 사이버테러까지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물론 익명성 때문에 비롯되고 있다. 스타이너가 인터넷의 익명성을 지적하면서 하필이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그것도 개(dog)를 그렸는지 알 것도 같다.

언론에서도 인터넷의 익명성이 초래하고 있는 부작용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면서 국가와 사회가 함께 대안마련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은 매우 비관적이다.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갖가지 사회적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1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무질서의 공간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지금이 더 심각한 상황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5~6년 전의 일이다. 공익광고협의회가 TV와 라디오를 통해 ‘인터넷 예절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캠페인 문구는 「네티즌은 얼굴 바꾸기의 달인」이란 주제 아래 “네티즌들은 인터넷과 마주하기만 하면 수만 가지의 얼굴로 변하는 야수가 되기 쉽다”며 “그것이 당신의 모습이라면 이제 가면을 벗어라”는 내용이었다. 당국에서 오죽하면 '야수‘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이 같은 캠페인을 벌였겠는가.

지금 기장군 노조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지난달 말에 발생한 군청간부와 시의원간의 충돌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의회 도중 군청의 한 간부가 행정기구 설치 조례 일부개정안조례안에 반대하는 군의원의 멱살을 잡은 것이 발단이 된 모양이다. 이 사건은 지역 언론에도 보도돼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관련해 게시판에 자신의 의견을 올리고 있다. 가만히 보면 점잖은 의견도 있지만 과격한 경우가 훨씬 많다. 다소 온건한 의견에 대해서는 악플이 줄을 잇고 있다.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노조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라는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좀 지나치다는 생각까지 든다. 멱살을 잡힌 사람이 노조원이라면 몰라도 군의원이라는 점에서 게시판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모를 일이다.

게시판 첫머리의 ‘공지사항’에는 분명히 “이 공간은 열린 공간이어서 여기를 찾는 사람은 가족과 공무원만이 아닌 학생과 시민들이라는 점을 항상 의식하면서 우리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지 않게 품격 높은 글을 써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명시해놓았는데도 실상은 그렇지 못해 다소 실망스럽다. 주민의 이목을 생각해서 좀 더 차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최근에 발간된 『디지털 휴머니즘』의 저자 재론 레이니어(컴퓨터과학자)는 ‘참을 수 없는 디지털 문화의 가벼움’을 개탄하면서 “개개인이 온라인상의 네트워크에 매달리는 것은 디지털의 가학성(加虐性) 때문이다. 온라인은 언제라도 특정한 개인을 표적으로 삼아 잔인한 공격을 가할 수 있다. 이를 부추기는 것은 디지털 세계의 익명성이다”라고 지적했다. 노조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의 분위기와 관련해 우리 모두가 경청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된다. 이참에 표현의 자유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을 때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2011.03 <기장군보 '기장사람들' 3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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