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52 [칼럼니스트] 2011년 1월 1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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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

이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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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다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도락(道樂)으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노쇠와 기력의 부족을
도리어 정신의 기폭제(起爆劑)로 삼아
삶의 진정한 쇄신에 나아가자.

관능적(官能的) 즐거움이 줄어들수록
인생과 자신의 모습은 또렷해지느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더욱 불태워
저 영원의 소리에 귀기울이자.

이제 초목(草木)의 잎새나 꽃처럼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무상(無常)한 꿈에서 깨어나

죽음을 넘어 피안(彼岸)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不滅)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白金)같이 빛나는 노년(老年)을 살자.』

위의 글은 내가 최근에 읽은 구상 시인(1919~2004)의 노경(老境)이라는 제목의 시 전문이다. 청년시절, 좋은 문장 써보겠다고 나름대로 시를 많이 읽어봤는데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가슴에 와 닿는 문구로 이어진 시는 처음인 것 같다. 이 나이에 이런 금쪽같은 시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시에서 압권(壓卷)은 아마도 마지막 두 연(聯)의 “이제 초목의 잎새나 꽃처럼 / 계절마다 피고 스러지던 / 무상한 꿈에서 깨어나 / 죽음을 넘어 피안에다 피울 /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는 대목이 아닐까싶다. 그중에서도 백미(白眉)는 끝부분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는 시구일 것이다.

시인은 어쩌면 이렇게도 내 마음에 꼭 드는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마치 내 앞에서 직접 육성으로 들려주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 많지 않은 앞날을 살아가면서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명구가 아닐 수 없다.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 성찬경 시인은 이 문구를 보고 “한국시에 명시 명구도 많지만 문자 그대로 나를 벼락치듯 전율시키는 시구는 바로 이 구절”이라고 말했다.

황금보다 더 귀한 백금. 빛은 나지만 황금처럼 요란하지 않고 차분한 것이 백금이다. 번쩍이는 노란색이 아니라 은은한 흰빛이다. 노년의 은유로 이보다 더 들어맞는 말이 어디 있을까. 성찬경 시인의 시평(詩評)처럼 이런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존재와 삶에 대한 지혜, 위안과 평화를 얻게 한다.

나도 어느새 ‘어르신교통가드’를 받은 ‘지공세대(地空世代’가 됐다. 나라가 인정(?)하는 노인의 반열에 들어섰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닐 터, 몸 건강하고 마음까지 건강해야 할 나이를 먹은 것이다. 이제부터 요란하지 않고 은은한 색깔로 자신의 가치를 다하고 있는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아야겠다.
<20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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