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50 [칼럼니스트] 2010년 11월 1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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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의 피플파워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지난달 15일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과 함께 15년 동안 영화제를 이끌어 온 김동호(73) 집행위원장이 퇴임했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영화제로 발돋움 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김 위원장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 탄탄한 인맥이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 김동호 위원장이 고별연에서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겪었던 일들을 평생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 속 깊이 새기겠다"고 퇴임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동호 패밀리'   
영화제가 열린 9일 동안 빡빡한 스케줄을 거뜬히 소화 해낸 폐막 다음날인 10월 15일 이른 아침. 김동호 위원장의 초대로 해운대의 단골 해장국집에서 지인들과 함께 만났다. 아버지의 퇴임을 보려 미국에서 건너온 김 위원장의 아들과 손자 두 명도 참석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소회를 묻자 "담담하다"고 담백하게 말한다. 가지고 온 양주로 해장술을 권한다. 15년 동안 거르지 않은 통과의례다. 변한 것은 본인은 술잔에 물을 담아 건배하는 것.   

참석한 지인들은 서울에서 내려간 '퇴기(퇴직 기자)' 세 사람과 목포에서 온 '순민(순수 민간인)'3명으로 김동호의 '서목(서울-목포) 팬 부대'의 일원이다. 퇴기들의 팀장 박연호 전 국민일보 논설위원은 문공부 출입기자시절, 보도국장인 김동호와 만나 36년 동안 인연의 맥을 끈끈하게 이어온 인물. '순민팀'의 간사 박삼석 씨는 박연호 위원의 고향친구로 김동호 위원장이 휴가 차 목포에 들려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열렬 팬이 됐다. 김동호의 마음을 끌어내는 친화력과 박삼석의 복선 없는 순수한 共鳴의 波長이 20년 넘게 이어졌다.

해장국집 주인은 경북 봉화에서 구입해 온 송이요리를 대접하며 연신 "아쉽고 섭섭하다"고 말 한 것도 떠나는 김동호를 생각하는 부산시민의 마음을 대변한다. 인기배우도 유명감독도 아니지만 김 위원장에겐 팬이 많다. 부산의 택시기사, 포장마차주인, 식당종업원, 자원봉사자와 시민들도 그를 만나면 사인을 요구한다.      

연극배우 박정자·윤석화, 가수 노영심, 임권택 감독, 영화배우 안성기·강수연 등은 문화계의 '김동호 패밀리'로 알려진 절친사이다. 부산영화제 출범부터 인연을 맺은 국민배우 안성기·강수연은 김동호 위원장의 퇴임을 기리기 위해 폐막식 사회를 맡았다. 음악인 노영심은 '지금이 사랑이다'를 작사 작곡하여 송별연에서 석별의 노래를 불렀다.

한 다리만 건너면 다 통한다는 게 한국인의 '사회 연결망'이다. '김동호 패밀리'와 '서목팬 부대'는 자연스레 한통속이 되어 연례행사로 부산영화제 폐막식에 참석했다. 개막식이나 행사기간 때 들리면 바쁜 스케줄로 김 위원장을 만나기 어렵다는 게 이유다.

폐막식 하루 전인 10월 14일 밤,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폐어웰(Farewell) 파티에 영화계 인사는 물론 정·관계 인사, 지인 등 500여 명이 참석하여 그의 퇴임을 아쉬워 한 것도 그의 인간적 매력과 두터운 인맥의 반증이다. 고건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전 총리)이 폐막식에 참석했고, 윤주영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연이은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지미, 박정자, 문소리, 예지원, 김꽃비 씨 등 신구세대를 아우르는 여배우들은 김동호 위원장과 춤을 추며 석별의 정을 풀어냈다.

그의 인간관계는 국경을 넘나든다.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 미국의 올리버 스톤 감독, 중국 거장 허우샤오시엔 감독, 칸 영화제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 등도 부산을 찾아 김 위원장과의 끈끈한 친분을 과시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겪었던 일들을 평생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음 속 깊이 새기겠다"고 퇴임소감을 밝혔다. 10여 개 단체에서 전달받은 감사패와 행운의 열쇠 등 부상을 모두 현금화하여 불우이웃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박수갈채를 받았다.   


#인맥관리 치밀
김동호 위원장이 국내외에 걸쳐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비결은 무엇일까?.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여러 정권에 걸쳐 30여 년 동안 문화공보부 관료와 영화진흥공사 사장, 공륜 위원장 등을 지낸 주류 엘리트 관료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선입견은 오산이다. 겸양과 배려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인맥형성의 키워드다. 댓잎에 부는 바람결처럼 부드럽지만 대나무처럼 꼿꼿한 선비로 흐트러짐이 없다. 박찬욱 감독은 "술 세고 청렴하고 온화한 이미지 뒤에는 지략가로서 면모가 숨겨져 있다"고 평가했다.

대인관계의 원칙을 묻자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소탈하게 대하려 한다"는 소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이와 성별, 직업을 떠나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고 아랫사람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는 친화력으로 '敵이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공적인 자리는 물론 술자리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의 말은 일체 하지 않는 것도 중용과 겸양의 미덕이다.

퇴임을 앞둔 한달 전부터 매스컴의 인터뷰 요청이 밀려와도 거절하지 않았다. 영향력 있는 방송이나 신문을 선택하여 집중화 할 만도 한 데, 국내 모든 언론, 미국 '할리우드 리포터' 영국의 '스크린 인터내셔널'과 대학신문 학생기자의 요청에도 성실하게 응하여 호감을 갖게 만든다.

인간관계를 부드럽고 원만하게 해주는 매개는 술이다. '김동호 패밀리'와 '서목 팬 부대'가 해운대 포장마차를 순회하며 술잔을 기울인 것도 인간적 교감의 폭을 넓혀주었다. 남포동 포장마차에 빈자리가 없어 해외에서 온 게스트들과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술잔을 돌리던 광경은 전설이 됐다.

그의 폭탄주 실력은 '타이거 클럽(tiger club)' 탄생의 계기가 됐다. 티에리 프레모 칸 영화제 집행위원장 등 5명이 종신 멤버이고, 김 위원장은 '빅 브러더(Big Brother)'로 불리는 종신회장이다. 해외영화제에서 만나면 밤새워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게 관례라는 것. 김 위원장의 두주불사 술 실력도 세월 앞에 장사 없듯 일흔 살이 되던 2006년 1월1일부터 매몰차게 끊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폭탄주를 제조하고 남들에게 권하는 '악취미'는 여전하다.

인맥관리 또한 치밀하다. 해외영화제에서 정이 담긴 선물을 받으면 1년 후 다시 그 영화제를 찾을 때 선물을 준 사람을 만날 장소에서는 꼭 선물 받은 물건을 착용한다. 해외영화인들이 김동호를 '미스터 김'으로 호칭하는 것도 '친절한, 성실한, 유명한' 등의 含意가 담겨있다.

특히 인간관계가 돋보이는 것은 한결 같은 마음이다. 논산훈련소 내무반 동기들과 52년째 정기모임을 가질 정도로 인연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해관계에 얽혀 돌아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그의 恒心은 아침 햇살처럼 포근하고 붉은 노을처럼 아름답다.

#아름다운 퇴임
김동호 위원장은 '부산영화제의 아버지`란 영예로운 칭송과 함께 영화제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났다. 고문이나 명예집행위원장 직책도 사양했다. "떠난 자가 한 다리를 걸쳐놓으면 다음 首長이 불편해 질 것"이라는 배려다.  

김 위원장은 지난 10회 영화제 이후부터 전용관 건립과 예산 확보만 되면 위원장 자리를 떠나겠다고 공언해왔고 그 약속을 지켰다. 그 과정에서 김 위원장은 이용관 부집행위원장을 공동위원장으로 추천해 퇴임준비를 해왔다. 자신의 공백을 최소화하려는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올해도 발목이 잡힐지 않을까 언론을 통해 퇴임을 못박았다. 이 정부 들어 유난히 문화계 기관장들이 자리에 연연하며 '버티기'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에 그의 퇴임은 그 어떤 영화의 해피엔딩 보다 아름답다.

공직생활 30여 년이 인생1막이라면 부산영화제 15년은 인생2막이다. 퇴임 후 펼쳐 갈 인생3막이 궁금해 물었다. "미술사와 서예, 한학을 공부하고 영화계 거장들을 만나 영화를 주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묶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볼 계획"이라고 한다. "포르투갈 마뉴엘 데 올리베이라 감독은 103살로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현역이다"고 전제한 뒤 "그 분보다 30살은 젊으니까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의욕을 보인다. 언젠가 김동호가 찍은 다큐영화가 부산영화제에 초대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김동호 위원장은 1937년 강원도 홍천 출생. 중학교 1학년 때 6·25전쟁이 발발, 부산에서 4년 간 피란 생활을 한 것이 부산과의 인연이다. 1961년 문화공보부 주사보로 공직에 입문하여 문화국장 보도국장 기획관리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영화진흥공사 사장(1988∼1992) 때는 밤새 술을 마셔가며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을 설득해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설립하는 뚝심을 보였다.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1992), 문화체육부 차관(1992∼1993)을 역임했고 공연윤리심의위원회 위원장(1993∼1995)을 끝으로 34년 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에 취임해 15년 동안 영화제를 이끌었다. 대한민국 영화대상 공로상, 은관문화훈장, 프랑스 예술문학훈장 '오피시에' 등을 받았다. 약사인 부인 홍명자(70)씨와의 사이에 1남 2녀.
<'대한언론' 201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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