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48 [칼럼니스트] 2010년 10월 2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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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극물 다루듯 분노를 관리해야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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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중에 배우기 좋아하는 이가 있습니까?” “안회가 배우기를 좋아해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않고, 한번 저지른 잘못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명이 짧아 일찍 죽었습니다. 그 이후 배우기 좋아한다는 이를 듣지 못했습니다”

춘추시대 노나라 임금 애공이 공자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한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공부 하면 학과성적, 상급학교 진학 그리고 취업시험 같은 것들만 떠올리는 요즘 사람들이 얼른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제자 수가 약 3천명에 이르렀다는 이른바 ‘공자 아카데미’의 본업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인데 어떻게 안회 하나만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꼽힐 수 있는가. 나머지는 공부가 싫으면서도 마지못해 배우러 갔다는 말인가.

유가에서 말하는 공부는 각자 ‘하늘로부터 받은 선한 본성’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여 도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것의 유혹이나 집착에 흔들리지 않도록 꾸준히 자신을 갈고 닦는 수행은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다. 이것이 유가에서 주장하는 ‘도’의 실천과 공부의 핵심이다.

‘분노를 남에게 옮기지 않고, 한번 저지른 잘못은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다(不遷怒 不貳過<불천노 불이과>)’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분노가 바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이나 일 때문에 촉발된 것이다. 따라서 나를 분노하게 한 대상을 정확히 파악해 폭발 범위를 거기에 한정시킨 것이다. 어느 일에 화가 났으면 정확하게 그 사람, 그 일만 거론해야지 지난 간 다른 일까지 들추어내는 못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적진을 칠 때 군사시설이나 요인만 골라 폭격하는 정밀타격과 같다고나 할까. 며느리가 시어미한테 욕먹고 죄 없는 강아지 발로 차거나, 학교선생 또는 직장 상사가 부부싸움 뒤 출근해서 학생이나 부하 직원에게 생트집 잡고 분풀이하는 식으로 분노를 다른 대상에게 옮기는 것은 전쟁에서 민간시설과 무고한 민간인까지 무차별 살상하는 만행과 다를 바 없다. 안회는 이를 피할 줄 알았다. 공부의 최종단계인 행동을 그는 실천한 것이다.

반면 잘못이나 실수는 전적으로 내게서 비롯된다. 내가 저지른 것이므로 나 이외에 탓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가혹하게 꾸짖고, 엄격하게 다스려 재발을 막아야 한다. 이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참을 인(忍) 석자면 살인도 면한다’ ‘순간의 분노를 참으면 백날의 괴로움을 피할 수 있다<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인일시지분 면백일지우>’라는 등 늘 참는 것이 최선이라고 배워 온 우리들로서는 여기에서 또 한번 헷갈릴 수 있다. 즉 다른 데로 옮기지만 않으면 화가 났을 때는 언제든 폭발해도 좋다는 뜻인가 하고 말이다.

그건 아니다. 논어 맨 첫머리에서 ‘남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군자 아니겠는가’ 라고 강조한 것처럼 인내를 최선으로 꼽는다. 종합하면 참을 수 있는 한 참고, 그래도 화낼 수밖에 없으면 해당 대상과 사안에 한정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도통한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나 가능하지 보통 사람들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날마다 지지고 볶고, 터지고 싸우는 것이 우리네 일상 아닌가.  미국, 한국 등 각국에서 ‘분노조절 프로그램’이 성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내용은 대체로 분노의 원인과 정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여기에 대응하는 자신을 또 다른 나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관찰하라고 요구한다. 그런 다음 참는 데까지 참고,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분노하라고 한다.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잭 니콜슨이 출연한 영화 ‘성질 죽이기’(원제는 ‘분노 관리하기’. Anger Management)는 바로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분노의 폭발은 과장하면 전쟁과 비슷하다. 개인과 국가 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패자는 물론 승자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파괴와 상처를 남기는 것이 전쟁이다. 따라서 심사숙고하여 불가피하다고 판단될 때 폭발시켜야 한다.

고농도 에너지가 내재된 극도로 위험한 폭발물이자 독극물이 바로 분노다. 터지면 도중에 통제할 방법이 없는 수단으로, 한번 끔찍한 상황에 이르면 원상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냉철한 이성의 판단이 뒷받침하는 조절과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때 냉정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미국 스트레스 센터의 회원을 위한 기도문은 그래도 길이 있으니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라고 강조한다. “주여, 제가 바꿀 수 있는 일은 바꿀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 그러나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내를 주옵소서. 그리고 제게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옵소서.”

개인적 분노뿐만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도 함께 적용되는 좋은 말이다. 즉 불의에는 과감히  맞서고, 변화시킬 힘을 강력하게 발휘하도록 권장하는 것이다. 정의를 위한 공분마저 참아야 한다면 사상 최초의 시민혁명인 프랑스 대혁명이나, 우리나라의 4.19는 있을 수 없었다. 시민들의 ‘바꿀 수 있는 힘’이 정당하게 발휘된 사례들이다.

유가에서도 불의에 항거하는 공적 분노는 권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맹자의 혁명론이다. 그는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백성이 갈아치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분노는 칼이나 불처럼 양면을 갖고 있어 사용하기에 따라 이기도 되고 흉기도 된다. 정의 수호와 공익 증진을 위해 사용한다면 이롭지만, 개인의 욕심이나 집착을 위해 악용하면 재앙만 불러온다.

원자력을 전력 생산 같은 평화적 이용에 국한하자고 말들은 하면서도, 여러 나라가 앞 다투어 핵무기 개발에 나서는 오늘날 지구촌의 모순과 같은 것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치료에 필요하면서도 오.남용하면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는 독극물도 마찬가지다.  

분노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무기이다. 그러므로 폭발물이나 독극물을 취급하는 전문가 못지않게 조심해서 관리해야 한다. 사용할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분노를 참아야 할 때 제동이 잘 걸리지 않고, 폭발해야 할 때 용기가 부족한 점을 잘 감안해서 현명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방치하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이에 대한 거의 유일한 방도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화날 때 그 분노의 정체를 살피고, 그걸 대하는 자신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단한 어려움과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이것이 최선의 길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다.

-‘나라살림 희망샘터’(가을호. 20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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