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37호 [칼럼니스트] 2010년 02월 0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딴글보기 | 거시기머시기 | 배달신청 | columnist.org(홈)

지공거사에게 부치는 글


홍순훈 (칼럼니스트)
http://columnist.org/hsh


한 세대 전만 해도 환갑잔치는 인간 삶에 있어서 중대한 행사로 으레 풍성히 치르는 동네 잔치로 알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잔치를 한다는 소식을 못 들었다.
그렇게 세태가 바뀐 이유는 첫째,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 아직도 살 날이 많이 남아 있는데 나이 60에 무슨 잔치를 한다는 것이 시기적으로 어정쩡하다. 그리고 둘째, 환갑잔치는 자식들이 차려 주는 것인데 만혼(晩婚) 풍조로 늦게 낳은 자식들이 자기 살기도 바쁜 마당에 부모 잔치상 차려 주기 어렵게 됐다 등일 것이다.

그래서 새로 생긴 풍속이랄까 구분이 ‘지공거사(地空居士)’다. 이 ‘지공’은 ‘지하철 운임 공짜’의 줄임말이고, 그 뒤에 붙인 ‘거사’는 사전적 의미로는 ‘①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 ②≪불교≫출가하지 않은 속인으로서 법명을 가진 남자’인데, ‘지공’으로만 부르면 뭔지 허전해서 별 의미 없이 갖다 붙인 호칭일 것이다. 그래서 필자 친구 몇이서는 ‘거사’ 대신 ‘이’자를 붙여 그냥 ‘지공이’라 부른다.

이 지공이 대꼬바리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엄연히 법적 근거가 있다. 노인복지법 제26조 ‘경로우대’인데, 거기 ①항을 보면 ‘65세 이상의 자에게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수송시설 및 고궁, 능원, 박물관, 공원 등의 공공시설을 무료로 또는 그 이용요금을 할인하여 이용하게 할 수 있다’라고 돼 있다. 여기서 ‘65세 이상의 자’가 바로 ‘지공이’고,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수송시설’이 그들이 공짜로 애용하는 지하철이다.

필자 5년 전 환갑 때는 환갑날인지조차 모르고 지나쳤지만, 지공 해인 금년에는 농협에서 발급하는 무임 교통카드 G-Pass 받는 날을 몇 번이나 달력에서 짚어봤다. 참 추하게 늙었다 누구는 비웃을지 모르나 당신도 늙어봐라.

또 누구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운운할지 모르나 필자는 그런 고고함은 젊은날의 한낱 객기로 치부하여 애시당초 바라지도 않았다. 한 여성의 아랫도리를 온통 고통 피범벅으로 만든 원죄(原罪)를 지고 이 세상에 나왔으면서 무슨 염치로 하늘에 한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겠는가?
사실 정욕과 탐욕을 못이겨 낯 뜨겁고 양심에 찔리는 행위를 많이 했다. 그 벌은 저 세상에서- 이 세상에서는 긁어부스럼 만들 필요 없고- 충분히 받을 각오가 돼 있고, 우선 이 글을 빌어 직 간접으로 피해를 본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필자 국민(초등)학교 때는 6.25사변 중이거나 사변이 막 끝난 비상 시기였다. 3학년 때든가 하루는 담임선생이 전 학급생을 일으켜 세우더니 함께 책상을 쓰는 짝꿍을 서로 마주보게 하고 상대의 뺨을 때리라는 것이었다. 때리기 곤란해 미적거리거나 때리는 흉내만 내는 녀석에게는 선생이 쫓아가 이렇게 때리라 귀퉁배기를 올려붙였다. 이 광란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후 50~60년대 외곬수가 컨셉이었던 중등,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나는 미쳤다. ‘암흑시기’에는 미쳤다는 자는 물론 미쳤고 미치지 않았다는 자도 미친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접한 후 지금껏 그 끈을 놓지 않고 관계된 글이라면 눈에 띄는 대로 줏어읽었다. 이 지식이 사회 인식의 밑바탕이 됐는데, 특히 행운은 40대 중반부터 사업을 한답시고 러시아에 들어가 한번 가면 몇 개월씩, 1년이면 적어도 반년 이상씩을 장기 체류한 것이다.
광대무변한 유라시아의 대자연에 혼을 맡기고, 발길 닿는 어디나 지천으로 널린 절대자유(絶對自由)를 만끽했다. 40대, 50대 인생 황금기에 펼쳐진 이 황홀한 추억을 곱씹으며 이제 죽음으로의 카운트다운 지공을 맞는다.

자유에서만
죽음이 보이고
삶을 느낀다

진실에서만
자유가 숙성되니
사람들아

농담에서라도
삼가 달라
거짓과 사기를

-2010. 2. 9.
[참고 : 이 글은 現 "암흑시기"에 맞춰 칼럼과 詩를 결합시킨 새로운 시도입니다 - 필자]

서울칼럼니스트모임 http://columnist.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