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27 [칼럼니스트] 2009년 11월 1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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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아이발릭 해변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세상 끝에서 부르는 희망 노래
'우수아이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동네 꼭대기쯤에 짐을 풀고, 숙소 주인에게 물었다.
"여기 어디 등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말한다
"우수아이아에 등대는 없소.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중국 사람이 그런 영화를 찍어 등대를 찾는 사람이 간혹 있긴 한데 등대는 여기 있는 게 아니라 배를 타고 한 시간 반쯤 가야 할거요."
등대를 찾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다.
"이곳은 세상의 끝이지만 그렇게 절망스럽진 않다오. 반대로 생각하면 세상의 시작인 곳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나는 참으로 희망적인 곳이라고 생각하오. 물론 여기서 더 갈 곳이라고는 남극밖에 없지만 말이오. 젊은이, 세상의 끝에서 뭔가 시작할, 새로운 다짐을 해보시오."
그렇다. 나는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는 물러설 수도 없는 이곳에 왔다.'(211-212쪽)

여행에세이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변종모| 달| 2009)의 저자는 세계의 땅 끝이자 남극으로 가는 길목, 남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Ushuaia)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1997년 작) 주인공도 평소 가보고 싶어하던 우수아이아를 마침내 찾는다. 세상의 모든 고독과 절망을 털어 내고 희망의 싹을 키우기 위해.
일곱 번이나 사표를 쓴 뒤 배낭을 메고 해외로 훌쩍 떠나고, 돌아와서 다시 떠날 준비를 하는 여행작가 변종모의 삶 자체가 여행이다. 또 다른 세상과의 소통과 순박한 사람들의 일상과 만나 공명을 이루는 울림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의 넉넉한 자유와 느림의 여정이 부럽다. 배낭여행을 꿈꾸면서 시늉에 그치고, 편이성에 함몰된 나의 여행을 부끄럽게 만든다.
'지구를 몇 바퀴 돌아도 세상을 몇 번을 살아도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 다는 것. 여행은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낯선 곳에서 익숙한 자신과 만나는 일이다.'(333쪽) 그는 홀로 떠난 여행지에서 숙성시킨 자아와 만나 또 다른 세상을 꿈꾼다.

사진 : 에게해의 낙조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지난 여름 터키여행에서 여백의 시간을 잠시 누린 곳은 에게해의 휴양도시 아이발릭(Ayvalik) 해변이다. 찬란한 문화유적과 위대한 자연유산이 수두룩한 터키는 이동거리가 길어 빠듯한 일정에 자신을 돌아 볼 여유조차 없었다.  
아이발릭에 여장을 풀고 용암이 부서져 모래가 된 금빛 해변을 맨발로 걷는다. 에게해의 파도가 밀려와 발바닥을 간지린다. 나무껍질로 엮은 비치파라솔 등의자에 기대어 잘게 부서지는 눈부신 햇살과 소금기 묻은 해풍에 찌든 영혼을 말린다.
푸른 눈의 소년이 다가와 낯선 동양인에게 "안뇽"하며 인사를 건넨다. 올해 아홉 살로 이탈리아에서 왔다고 한다. 피부색깔이 다르고 생각의 색깔이 다르고 나이가 달라도 여행지에서는 친밀감이 전류처럼 흐르며 쉽게 동화된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함께 여행을 다니며 세상 보는 눈을 넓히는 참 행복한 아이다.  
에게해로 서서히 빨려드는 노을을 바라본다. 낙조가 너울너울 불춤을 추며 뭉개 구름을 홍차빛으로 물들인다. 쪽빛 너른 바다에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선홍빛 석양이 짧고 강렬한 몸짓으로 에게해에 풍덩 몸을 던진다.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젊은 연인들은 노을 앞에서 진한 입맛춤을 한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순수하게 순치 시키는 힘이 있다. 아름다운 황혼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또 하루가 저물 듯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휩쓸려 아등바등 살아온 날들이 에게해의 어둠에 묻힌다. 살아온 날들 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은 나이, 희망을 꿈꾸는 것은 허욕이자 사치다.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바쁜 일상에 매몰된 잃어버린 나를 찾기 보다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노추(老醜)를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것이 남은 인생여정임을 안다. 여행은 낯선 곳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다.

#허욕 버리면 새털처럼 가벼워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지가 세상의 끝 우수아이아가 아니라도 좋다. 에게해에 지는 낙조가 아니라도 괜찮다. 한 해를 되돌아보고 반추하기엔 석양빛이 고운 서해의 간월암(看月庵)이 제격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의 작은 암자. 하루 두 번씩 밀물과 썰물 때 섬이 육지로 바뀌고 육지가 섬이 되는 곳.
원래 이름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피안사(彼岸寺)였으나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간월암으로 바뀌었다.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바라보며 살아온 어리석은 날들을 되새겨보자. 헛된 욕망의 그물을 노을 물든 바다에 던져버리면, 마음은 노을 속을 비껴 가는 새털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뜬다.
-‘바른조달’(2009 겨울호)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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