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26 [칼럼니스트] 2009년 11월 1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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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시절 해외여행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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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월 어느 날 밤 1시쯤 나는 동경의 한 호텔에서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넋을 잃은 듯 본 것은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쉴 새 없이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이었다. 밤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어서 그 동안 모든 것이 단절되는 나라 사람의 눈에는 일본의 한밤중 풍경은 충격이었다. 한편 분노가 치밀었다.

게다가 출국하면서 겪은 갖가지 고생을 생각하니 쉽사리 잠도 오질 않았다. 그 때는 여권 신청을 하려면 먼저 반공센터 등지에서 하는 소양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 내용은 외국에 나가 북괴(당시는 북한괴뢰도당이라 불렀다)의 공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특히 일본지역은 조총련 등 빨갱이들이 득실거리니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자칫하면 자신도 모르게 간첩과 접선하게 되니 그리 알라는 것이었다.

교육수료증서를 첨부해 신원조회 요청을 하고 ‘이상 무’가 되면 여권신청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여간 애를 먹이는 게 아니었다. 대개 일주일이면 통과 여부가 나오는데 좀 문제가 있다 싶으면 경찰 조사로 불충분하니 중앙정보부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중통’이  찍혀 나왔다. 이런 사람은 절차가 너무 복잡해 여권을 포기하는 편이 나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중통’도 아니면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절차 때문에 피가 마를 지경이어서 몇 번이나 일본 출장을 포기하려 했다. 오죽하면 이민 가는 이들이 비행기에 오르면서 다시는 이 땅에 오지 않겠다고 침을 뱉는다는 말이 나돌았겠는가. 또 잠깐 나왔다가 귀국하는데 김포공항이 가까워 오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답답해진다고들 했다.

일본 사람들을 만나 이러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우리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보통 유럽을 너덧 차례  다녀오고 미국은 신혼 여행등으로 옆집 드나들 듯 한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우리 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2차 대전 당사자로 패전한 일본은 모든 것을 구가하고, 우리는 약소민족이라는 이유로 남북이 분단돼 인간의 기본적인 여러 가지 욕구를 제한당하니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서독에 가서 받은 충격 또한 이에 못지않았다. 서베를린을 가는데 육로를 택했으므로 동독 땅을 지나야 했다. 국경 검문소에서 비자를 받는데 한국인들은 별도의 용지를 주면서 동독을 떠날 때 반납하도록 했다.

적성국인데다 60년대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등을 떠 올리며 잔뜩 위축되어 있는데 동독군인이 버스에 오르더니 한국인 인원만 따로 파악했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내 여권을 보자더니 거기에 동독입국도장을 찍겠다는 것이었다. 방금 비자 대신 종이를 발급했는데 무슨 말인가 싶어 어리둥절하니 이 친구 웃으면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이걸 찍어 놓으면 당신은 김포공항에서 기관원에게 잡혀갈 것이라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

농담할 것이 따로 있지. 자기들도 분단국가이면서 이 따위 장난을 하다니... 그러면서 창밖을 보니 서독인인 우리 버스 기사가 동독 군인들과 웃으며 잡담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의 여유가 또 다른 충격이었다. 휴게소에서는 돈도 서독 마르크를 내면 더 좋아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서베를린에 도착하니 가이드가 한국인들은 지하철을 조심하라고 했다. 지하철이 동서 구분없이 다니니 아차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동베를린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북괴 요원들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붙잡혀 간다는 농담성 경고를 했다. 기가 막혔다. 같은 분단국이면서 우리는 그들과 왜 그리도 다른지...

밤이 되니 같이 갔던 프랑스 교수 한분이 TV 채널 몇 번을 틀어보라고 했다. 그러면 동독방송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그걸 보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비웃어도 좋다. 그 시절은 그랬고 우리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 뿐만 아니라 쾰른 시내 한 여행사 안내판에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모스크바, 북경 여행객 모집 광고를 보고도 우리는 못본 체 했고, 파리 오를리공항에서 소련여객기 아에로플로트를 먼발치에서 보면서도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언제나 감시의 눈초리가 뒤따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들은 그처럼 주눅이 들어 있었다.

여행자유화가 된 지금 젊은 세대는 상상도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성장했고 성숙해졌다. 해외에 있는 북한 상점과 식당이 관광코스에 들 정도가 되었다. 아직도 비이성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한 북한 때문에 당시 동.서독 수준이 되려면 상당히 멀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진 셈이다.

그래서 나는 누구든지 기회가 되면 여행을 가도록 권장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거의  반세기 동안 우리의 견문을 제한하던 벽이 허물어졌으니 나가서 많이 보고 들어, 생각과 관점의 균형을 잡고, 어디 가서든 당당한 세계시민이 되길 마라는 마음에서이다. 또 여행은 독서 못지않게 개인의 삶과 생각을 깊고 풍부하게 해주는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바른조달’(2009 겨울호)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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