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24 [칼럼니스트] 2009년 10월 31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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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혜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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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모처럼 저녁을 먹고 이야기 하다 시간을 보니 지하철 막차시간이다. 후다닥(요즘 인터넷용어로는 휘리릭~) 뛰쳐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니 벌써 썰렁하다. 물어보니 토요일은 평일보다 막차가 빨리 끊긴다고 한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보지만 밤이라 깜깜하고 불빛이 희미해 시간표는커녕 행선지 목적지 글자도 잘 읽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택시를 세운다. 조금만 가면 철커덕 하고 버스비만큼 올라간다. 목적지에 다다라 택시비를 지불하려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보니 1000원짜리인지 10000원짜리 인지 모르겠다. 또 5000원짜리인지 새로 나온 50000원 짜리인지도 모르겠다. 택시 안 불빛도 희미하기만 하다. 한참만에야 더듬거리며 돈을 지불하고 집으로 들어선다.

다시는 저녁에 안 나와야지, 왜 시간 가는 줄도 몰랐을까, 왜 나는 토요일 지하철이 평일보다 빨리 끊긴다는 사실도 모르고 살까, 버스정류장에 쓰인 글씨도 못 읽으면서 왜 밤에 나돌아 다니나, 나이 들어 이제는 숫자도 헷갈리고 돈도 잘 구별 못하니 정말 한심하다 등등 자신을 질책하는 병이 도져 우울해졌다.

다음 날 기분전환도 할 겸 외식 절대 안하고 집에서 먹을 요량으로 사골국 끓일 재료 사러 마트로 간다. 지난번 사서 물 붓고 푹끓이니 뽀얀 국물이 많이 나와 맛있게들 먹었으니 같은 걸로 사야지. 포장지에는 사골국 끓이는 법이 여전히 작은 글씨로 붙어있다. 글씨인 것은 알겠으나 무엇이라고 적혀있는지 흐릿하다. 집에 와 돋보기를 찾는다. 그리고 읽은 다음 포장지를 벗긴다. 집에서 사골국 끓이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알고 이렇게 깨알만한 글씨로 친절하게 설명해놓은 것일까 참 한심한 생각이 든다.

수많은 돈을 들여 소위 시장조사라는 것을 안 해도 나는 안다. 음식점에서 먹을지도 모를 인공적 뽀얀 국물 가족들 안먹일려고 몇 시간 씩 집에서 사골국 끓이는 사람은 다 엄마들이거나 나이든 사람들이다. 어느 20대 30대가 안 나가고 피자 배달 안 시키고 집에서 하루 종일 사골국 끓이고 있냐 말이다. 그런데 포장지 글씨는 깨알만하다. 사골국 끓이려면 보통일이 아닌데 기름 묻은 손으로 돋보기 안경 찾아 꼈다 벗었다 하면서 내 돈 쓰면서도 살기 힘든 곳이라고 푸념을 한다. 주윗분들도 화장품 약 등 대부분의 상품설명이 그렇다고 동조한다.

언젠가 어느 커피 집에서 이천 원 낼 때마다 카드로 내다가 현찰을 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그런데 주면서 이게 만 원짜리인지 천 원짜리 인줄 모르겠다면서 나이가 드니 눈이 흐려서 그렇다고 하니 우리도 그렇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손님이 낸 돈을 천 원짜리 인줄 알고 받았는데 나중에 항의전화와 만 원짜리였다고 펄펄 뛰는 바람에 계산대를 열어 보니 천 원짜리 칸에 만 원짜리가 천 원짜리와 함께 있어 돌려주었지만 의심을 벗지는 못했다고 한다. 매일 현찰을 만지는 전문가들도 헷갈리게 만든 돈은 과연 누가 디자인 하는가?

신사임당이 어떻고 누가 화폐에 들어가야 한다는 둥 그런 거룩하고 중요한 결정에만 참여하고 정작 돈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불편할지도 모를 그런 면은 간과한 것인가? 평생 책 잘보고 쓰고 읽고 눈이 좋게 살다가 50대에 찾아온 노안 한 가지 가지고 이렇게 살기가 불편하다면 더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어찌 살란 말인가?

또 필요해서 무슨 자료를 찾아보니 떡하니 9포인트 크기로 인쇄해 놓았다. 특히 이름의 경우 ‘은’ 인지 ‘온’ 인지 ''인' 이지 '언' 인지 ㅇ과 ㅡ 나 ㅣ 사이에 점이 있는지 없는지 떡져서 한데 붙어버려 확대해도 확실치가 않았다. 오래된 자료에 나타난 이름은 컴퓨터 확인도 어렵다.

요즘은 또 문자로 칼라메일이라는 것이 온다. 보통 문자도 그럭저럭 받고 보내고 하는데 이 칼라메일 이라는 것은 휴대전화 화면을 마치 컴퓨터 화면으로 아는지 깨알만한 글씨로 온다. 이렇게 보낸 사람과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이 밉다. 도대체 상대방이 눈이 나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좀 생각해주면 안되겠는가 말이다. 11포인트 정도로 해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 언젠가 나를 보더니 숫자가 크게 쓰인 전화기를 사달라고 하여 전화기 파는 곳에 갔더니 마침 운 좋게 숫자가 열배쯤 쓰인 전화기가 있어 구해드렸더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원하는 것이라고는 자식들에게 전화할 때 숫자가 제대로 보여 누를 수 있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아마 휴대폰 숫자 안보여 급할 때 누르지도 못하고 갈 것 같다.
(좋은 소식: 요즘은 근처에 정육점이 생겨 아저씨에게 의문사항을 입으로 직접 물어봅니다. 택시비는 카드로 낼 수 있더군요. 그런데 돈 문제는 지갑에 돈이 말라 동전으로 살다보니 해결되었어요)<

-2009.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