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20 [칼럼니스트] 2009년 10월 2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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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선비정신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비에 젖은 도시가 선잠에서 깨어나는 지난 17일 이른 아침, 부산 해운대 해장국집.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집행위원장(사진)이 모습을 드러낸다. 8박 9일 동안의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도 피로한 기색이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다.

밑반찬과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참석한 지인들에게 양주를 따른다. 해장술로 양주를 마시는 거절할 수 없는 폐막식 다음 날의 연례의식이다. 정작 모임의 주역은 3년 10개월 째 술을 끊고 소주잔에 냉수를 따라 건배하는 게 달라진 점이다. 김 위원장의 로비력은 술 실력이라는 우스개가 나올 정도로 두주불사(斗酒不辭)에 '국제 영화인 주당(酒黨)'을 만든 장본인이다. 영화제 초창기 술집이 문을 닫으면 해운대 백사장에 해외귀빈을 모시고 폭탄주를 돌린 '스트리트 파티'와 자원봉사단 백여 명과 일일이 폭탄주를 한 잔씩 마셨다는 일화는 전설이 됐다. 주선(酒仙)의 경지라도 세월이기는 장사는 없는가 보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김 위원장은 도쿄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러 김해공항으로 향한다.
사흘 뒤 귀국하자 곧바로 DMZ다큐영화제에 참석하는 등 일년 내내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지는 영화세상을 누빈다. 부산국제영화제 산파역을 맡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자리를 굳힌 것은 세계영화계의 틈새시장인 아시아를 특화하는 차별화 전략이 주효했고, 부산시민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시너지효과를 냈다.
영화관련 단체 등 외곽 기관들과의 협력체제 구축, 스폰서 물색, 해외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장 등 인적 네트워크 형성은 그의 몫이다. '지자체는 지원하되 간섭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민간주도의 축제로 이끌어 왔고, 정치인들의 축사나 기념사를 일관되게 거절해 온 것도 원칙을 중시하는 선비정신의 발로다.

나무가 클수록 외풍은 거세다. 부산영화제 성공을 계기로 국내에서 개최되는 국제영화제가 10개 넘게 늘면서 프리미어 다툼과 경쟁이 심화됐다. "한 영화를 놓고 서로 초청할 때 그 영화의 제작사나 배급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부산으로 올 수밖에 없다"며 초연했다. '좌파 영화제'라는 생뚱맞은 색깔론까지 덧씌워 흔들었으나 "진심을 보여주면 오해는 풀리기 마련"이라며 대응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부산 시네마 르네상스시대를 열었다. 마음과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기 마련이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상대방을 편하게 배려하는 기술을 지녔다. 사적인 만남이든 지위가 높거나 낮던, 나이가 많거나 적음을 떠나 존칭어를 쓴다. 영화인들과 문화계 인사 등 수많은 지인들의 경조사는 일일이 챙기면서도 정작 자식들의 결혼식과 부모의 상을 몰래 치렀다. 송홧가루 날리는 청솔 바람처럼 부드러우면서 내면은 댓바람처럼 청청하다.

부산국제영화제 10년을 끝으로 그는 물러나려 했다. 전용관 '두레라움' 건설과 주변의 만류로 임기가 연장되고 또 연장되어 이제 1년 남았다. 또 다시 발목이 잡힐까봐 두려운지 언론인터뷰나 비공식 만남에서도 마지막임을 강조한다. 우리시대의 선비정신은 지식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원칙을 지키고 남을 배려하는 덕목에서 우러나온다.
-교차로 0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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