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20 [칼럼니스트] 2009년 10월 2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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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사라진다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우리 글과 말의 훼손이 심각하다. 한글의 변용과 오용, 정체불명의 신조어와 무분별한 외래어가 판을 친다. 청소년들의 은어와 축약어는 외계어처럼 느껴질 정도로 알쏭달쏭하다. 우리가 우리 글을 홀대하는 가운데 인도네시아 소수민족 찌아찌아족(族)이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한 것을 세계는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과 가치가 새삼 입증된 경사다.

한글날을 계기로 한국은 물론 일본 언론까지 현지취재에 열을 올렸다.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는 찌아찌아족이 토착어를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이를 표기할 문자로 한글을 도입한 것은 한글의 세계화 작업에 매우 의미 있는 진전이다. 고유문자가 없는 소수민족들이 많은 만큼 한글을 공식문자로 채택할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세계화와 통신시설의 발달로 지구촌의 언어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몇 해 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앞으로 100년 안에 전체 언어의 90%가 사라질 수 있다’고 보도하여 충격을 줬다. 세계 인구가 500만~1000만 명에 이르던 1만 년 전에는 세계에서 1만 2000개의 언어가 사용됐지만, 60억 인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절반 수준인 6800개에 불과하다는 것. 이 가운데 400개는 극소수 노인들만 사용하는 실정이고, 또 다른 3000개는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멸종위기’의 언어들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인구의 소멸과 함께 고유언어가 운명을 같이 했지만 요즘은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조차 '지배적 언어(dominant languages)'를 자발적으로 채택하는 추세다. 영어가 지배적 언어를 지배하면서 세계화 시대의 필수적인 생활수단이 되었고, 영어가 개인의 실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됐다. 진학 취업 등 사회진출의 고비마다 토플 성적을 제시해야 인정을 받다보니 조기유학이나 어학연수 열풍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초등학생 두 명이 전철을 타고 영어로만 대화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비싼 돈 들여 유학을 다녀왔으니 영어 모르는 아이들과는 놀지 말고, 친구와 대화할 때도 영어로만 하라는 극성엄마의 엄명이 있지 않았겠냐 추측해본다. 성인들도 유식하고 멋져 보이기 위해 영어를 양념치듯 섞는 것은 보편화 됐다. 수입 황소개구리가 토종 개구리를 멸종시키듯 영어가 우리 글과 말의 영역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다민족국가로 많은 언어들이 혼재해 있다. 출산율마저 떨어져 우리 글과 말을 쓰는 인구가 그만큼 줄어든다. 민족사에서 으뜸가는 문화적 창조물인 한글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언어를 잃는다는 것은 곧 그 언어로 세운 정신과 문화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글이 병들면 우리의 정신도 병든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조선어학회 탄압 등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을 폈으나 결국 실패한 것은 우리말과 글을 막지 못했고, 우리의 정신은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 또한 2000년 동안 나라 없이 지냈으나 자기 말이 있었기에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교차로 09년 10월16일자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