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09 [칼럼니스트] 2009년 5월 3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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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행 - 청산도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짧은 봄이 아카시아 꽃잎과 함께 진다. 싱그럽던 신록도 취음(翠陰)으로 짙어졌다. 진정한 가족사랑은 빛이 바랜 채 일회성 이벤트만 요란했던 가정의 달도 저문다. 북한은 잇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위험한 도박을 계속하고, 전직 대통령의 비보(悲報)로 온 나라가 슬픔에 젖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디쯤 서 있는가를 자문해 본다. 문득 세상의 바다 위에 혼자 떠있듯 외롭다. 불현듯 그 섬에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섬 또한 바다 한 가운데 홀로 태어나 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형식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다.

전라남도 완도항에서 뱃길로 50분 거리에 떠 있는 청산도(靑山島). 지금 그 곳엔 쪽빛 바다 백사장에 파도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고, 정겨운 돌담 사이로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것이다. 청산도를 처음 찾은 것은 20여 년 전 ‘사라져 가는 풍물’을 취재하기 위해서다. 달팽이 속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과 죽담(돌과 흙을 혼합해 쌓은 담)을 사이에 두고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비비고 있는 풍경은 정겨웠다. 초가이엉 용마루에 꼭지를 올려 상투를 튼 모양의 ‘상투집’은 마치 잘 자란 송이버섯을 닮았다.

초분(草墳)을 확인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은 값진 소득이었다. 초분은 대개 집 가까이 설치하여 2~3년 뒤 백골만 남았을 때 땅에 매장하는 이중 장제(葬制) 풍습으로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드물다. 척박한 땅에서 쌀 농사를 짓기 위해 구들을 놓듯 돌 위에 흙을 덮어 논을 만든 ‘구둘논’에서도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생존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두 번째 청산도를 찾은 것은 영화 ‘서편제’가 공전의 히트를 친 이후다. 롱샷으로 촬영한 구불구불한 황톳길에 유봉과 송화가 주고받던 진도아리랑 가락을 떠올리며 찾아갔으나 시멘트포장길로 바뀐 것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왔다. 그 뒤 관광객들의 불만이 빗발치자 다시 황토 흙을 덧씌웠다.

하지만 청산도는 200년이 넘은 해송 군락과 고운 모래사장 등 때묻지 않은 섬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섬이다. 2007년 말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되어 명품 여행지로 뜨고 있다. 1999년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시작된 슬로시티운동은 속도의 경쟁에서 벗어나 ‘느림과 여유’의 가치를 지향하는 삶이다. 우리나라는 청산도를 비롯하여 신안군 증도와 담양 창평면, 장흥 유치면에 이어 올해 초 경남 하동군 악양면이 추가됐으며 현재 16개국 116개 도시가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신안 증도의 소금밭과 너른 갯벌, 하동 악양의 평사리 들녘과 최참판댁 고택, 담양의 청청한 댓바람 소리와 그 섬이 아니면 어떠랴. 신록이 짙어진 가까운 공원이나 고수부지를 느릿느릿 걸으며 여백의 시간을 누려보자. 바쁜 일상에 매몰된 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은 새로운 나를 찾아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마음의 여행이다.

-2009.05.29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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