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07 [칼럼니스트] 2009년 5월 13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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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 유감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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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오랜 만에 보리가 익어가는 들판을 보았다. 지방 특히 고향 쪽을 가끔 갔지만 대부분  서둘러 다녀오다 보니 논밭을 볼 겨를이 별로 없었고, 지나더라도 보리 익을 무렵 아닌 때가 많았다.

얼마 전 보리가 한참 익어가는 고향 부근 남도지방을 지나면서 마침내 누릇누릇 물들어 가는 보리밭을 많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밭을 막론하고 자라다 만 것처럼 보리들의 키가 작았다. 예전에는 가슴께에 올라왔는데 지금은 한결같이 무릎에도 한참 못 미쳤다.

동행한 고향친구에게 물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제대로 짓고 말려면 말지 왜 저렇게들 했지? 묵은 밭도 아니고...” 친구가 한참 의심하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보더니 내 질문의 진정성(?)을 파악하고 대답했다. 예전에는 보리가 익거나 가실할 무렵 거센 비바람에 쓰러지면 농사 망하는 판이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래 키를 작게 한 개량종을 개발해 지금은 모두 그걸 심는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되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보리농사를 했고, 수확기에 비가 오면 쓰러진 보리 세우느라 고생을 많이 했기에 얼른 알아들었다.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문득 두 가지가 떠올랐다. 먼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느라 보리밭에 들어가 남의 농사 망치는 일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게 됐다. 그런 일을 이제는 볼 수 없겠구나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하긴 농촌에 풋사랑을 속삭일 젊은이들이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이고, 또한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널린 게 모텔이니 보리 키가 예전처럼 크더라도 그런 용도는 이미 끝난 것이다.

두 번째는 윤용하의 가곡 ‘보리밭’.
‘보리밭 사이 길로 걸어가면...’으로 시작되는데 지금 보리밭은 예전과 다르니 그때 보리농사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이해하는데 문제가 좀 있지 않을까. 이 노래의 가사를 작사한 박화목은 ‘그의 고향(황해도) 보리밭에 봄바람이 불면 사뭇 바다처럼 물결 치고, 아늑한 하늘가에는 종달새 지저귀던 것’이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종달새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고, 발목을 간신히 넘을까말까 한 키의 보리밭 사이도 걸을 수 없게 됐으니 고인이 된 작사, 작곡자들이 이를 알면 얼마나 섭섭해 할까. 하늘이 무너지면 어떡하나하며 밤마다 잠을 못자는 기(杞)나라 사람 같은 걱정이나 한다고 누가 비웃을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저런 아쉬움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2009.05.11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