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01 [칼럼니스트] 2009년 4월 2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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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사비 스트레스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빠르게 늘어나고 있지만 '장수(長壽) 리스크'는 선진국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 '노후를 대비하지 않은 장수'는 축복만이 아니라는 의미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500만 명이 넘는 고령화사회지만 건강한 가운데 경제력을 갖추고 사회에 봉사하는 노인들은 그리 흔하지 않다.

최근에 만난 언론계의 대 선배는 팔순에도 왕성한 사회활동을 펴며 나이를 잊고 산다. 거친 말과 막말, 욕설이 판치는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으며 '바르고 고운 말 쓰기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격랑의 시대를 헤쳐 오면서 '자세를 낮추며 살자'는 좌우명에 얽힌 비화도 진한 감동을 준다. 6·25 한국전쟁 종군기자 시절 이동 트럭 위에서 인민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그 때 한 병사가 다가와 "자세를 낮추세요"라고 말 한 뒤 총탄을 맞고 "어머니!"를 부르며 숨졌다.

고향에 홀로 계신다는 어머니를 부르며 숨진 병사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고 회고한다. 휴전 후 자세를 낮추며 사는 겸손을 배웠고,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얻은 자신감이 삶의 원동력이 됐다는 것. 부인 또한 사회단체에 봉사하며 자식들 성공시키고 부부가 해로하고 있으니 참 행복한 은빛 실버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계 선배들은 노후 준비를 제대로 못했다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거나 성인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자주 접해 씁쓸하다. "병원비와 경조사비만 안 들어가도 살만하다"는 푸념을 자주 듣는다. 좋아하던 술과 담배는 끊을 수 있지만, 끊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이 병원비와 경조사비다. 오죽하면 부조금을 줄일 수 없는 '지위재(positional good)'라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경조사비의 인플레 현상이 물가상승을 앞지르고 있어 부담이 가중된다. 몇 년 전만 해도 3만원으로 통용되던 평균 경조사비가 요즘은 5만원으로 고착되다시피 했다. 가까운 사이엔 10만원이 기본이다. 직장생활을 할 땐 일을 핑계로 부조금만 전해도 허물이 안되었으나 요즘은 애경사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백수주제에 뭐 그리 바쁘냐'는 핀잔을 듣기일쑤여서 이래저래 고달프다.

퇴직 이후 재산이나 별다른 수입이 없는 경우 국민연금이나 개인연금 등에 의존하여 생활이 빠듯할 수밖에 없다. 노후에 자녀가 부양해 줄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10명 중 1명에 불과하다는 '부양의식'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났듯이 자식들에게 손을 벌일 수도 없는 실정이다.
지출항목을 줄이려다 보니 동창회 모임 등에 빠지거나 회비를 줄이고 다치페이를 하며 '절약형 모임 모드'로 바뀌는 추세다. 아예 지인들과 연락을 끊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상부상조의 미풍양속이 어느새 사회보험 성격으로 변질되어 노후가 준비되지 않은 노인들의 삶을 팍팍하게 만든다. 나이가 들수록 수입은 줄고, 병원비와 경조사비 지출은 오히려 늘어 스트레스를 받는다. 장례와 결혼문화의 가족화가 그래서 더 절실하다.
-교차로(09년 4월 1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