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500 [칼럼니스트] 2009년 4월 1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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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봄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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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그것? 별로 쓸 것 없어. 한번 헐었다 하면 벌써 며칠이고, 눈 깜짝하면 한두 달 같은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누가 이처럼 넋두리를 하면 대부분 금방 금방 떠오르는 말이 있을 것이다. “십 만원?  그거 별 거 아니지. 지갑 한번 열었다 하면 5,6만원 금방 달아나고 쓴 자국마저도 없으니...”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세월과 돈이 너무 헤퍼 이같이 한탄해 보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어영부영하다 보면 시간은 시간대로 덧없이 지나가고 돈은 아무리 버둥거려도 항시 부족하다.

그러나 시간에 대한 감각은 아무래도 돈보다 둔감해 그 사라지는 속도감을 훨씬 덜 느끼게 마련이다. 연말연시가 되거나 해가 질 때면 아, 벌써 일 년이 갔구나, 오늘 하루도 지났구나 하지 돈처럼 늘 허덕이지는 않는다. 그러다 보니 돈보다 시간낭비가 훨씬 심각함을 사람들은 별로 느끼지 못한다.

편집자가 이번에 ‘시간’을 주제로 잡은 것은 바로 이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경제 등 몇몇 분야에서는 1년을 4분기로 나눠 결산하고 예측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연말이나 되어야 세월을 결산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그런 틀을 깨고 1.4분기가 끝나는 봄을 시점으로 잡아 연말까지 남은 시간을 잘 쓰는 방안을 생각해보고자 한 것 같다.

마침 어느 포털에 ‘봄의 시작을 알리는 X월, 결심만 하고 있었던 일이 있다면 지금 시작해 보세요. 시작하는 일들을 XX 캘린더에 깔끔하게 정리해 보시구요’라며 주의를 환기시키는 광고가 나온 걸 보면 분기별 세월 점검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돈 못지않게 시간을 아껴야 된다고 누구나 각오는 하지만 실행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시간은 무형인데다 그 흐름에는 예측하기 힘든 변수와 변화의 작동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니 뭘 마음먹은 대로 추진해나가기가 어렵다. 늘 긴장할 수만은 없는 정신과 육체의 한계도 큰 요인이다. 그러다 보니 차라리 시간의 존재를 잊고 자신과 세월을 그냥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지금 어디쯤에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바둑의 형세판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바둑은 일종의 전투이므로 여러 점에서 상대를 제압할 기술과 장치를 구사해야 하지만 중간 중간의 형세판단 역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 물론 바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의 모든 분야에서부터 각종 시합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포커, 고스톱 등 놀이까지도 중간의 형세판단은 필수다.

그럼에도 바둑을 예로 든 것은 어느 종목보다도 형세판단에 노력을 기울이는 강도가 높기 때문이다. 바둑을 둘 때 틈틈이 상대보다 우세한가 아니면 열세인가를 판단해 그에 상응하는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바둑을 다 두고 나서 집을 세어 승부를 가리는 건 상황이 고착되었기 때문에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전투 중에 미세한 유.불리를 판단하는 것은 프로기사들조차도 어려워한다.

나와 상대가 동시에 움직이는 유동적 상태에서 서로간의 약점, 강점을 계산하고 상황의 변수를 헤아려 앞서 있는지, 아니면 지고 있는지를 계산해야 하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를 게을리 하면 예상 밖의 역전패를 당하거나, 반대로 역전승의 기회를 놓치고 만다.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는데 그 길을 찾지 못하게 된다. 병법 가운데 ‘知彼知己 百戰不殆(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모든 전투에 위험이 없다)’라고 했는데 틈틈이 형세판단을 하지 않으면 바로 적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꼴이 된다.

우리네 일상의 삶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자기실현을 위해 뭔가 하려고 결심과 각오는 늘 한다. 그러나 실전에 돌입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며 그나마 중간평가 및 형세판단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달리 말하면 내가 수행하고 있는 전투의 승산여부도 모른 채 뛰어들기만 하는 셈이다.

한 해의 4분의 1이 지났다. 어느 새 봄이 온 것이다. 바둑 같으면 형세판단을 몇 번 했을 시점이다. 우리도 저마다 자신의 애초 계획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하여 미비점이 있으면 보완책을 강구하고, 강점이 있으면 계속 살려서 밀고 나갈 동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농경시대 같으면 정초 못지않게 출발준비가 분주한 때이다. 지금은 계절 구분 없이 농작물을 재배하므로 봄이라 해도 예전과 다르지만, 산과 들에 나가면 자연이 바쁘게 서두르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즉 무형인 시간의 흐름이 풀과 나무, 꽃들을 통해 우리 시각에 전달되는 것이다.

거기에 맞춰 정초에 세웠던 계획이나 각오를 재다짐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돈은 각자 능력과 재운에 따라 몫에 차이가 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된다. 그러니 많고 적음을 탓할 여지가 없다. 단지 시간을 잘 쓰느냐 못 쓰느냐의 문제만 남는데 그건 결국 100% 자신의 책임이다. 이 시점의 형세판단은 그런 점에서 시간활용 방법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바른 조달’ 봄호(2009 04)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