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62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 딴 글 보기 | 손님 칼럼 | 의견함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홈) |
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4)


김동호 -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http://columnist.org/getiger


PIFF 조직위원회의 출범 이후 우리들은 필요 인력의 충원과 재원 마련에 주력하면서 그때 그때 부딪치는 숱한 과제들을 풀어 나갔다.

첫째 과제는 개최시기와 장소였다. 홍콩 도쿄 등 아시아지역에서 열리는 영화제나 그밖의 주요영화제의 개최시기, 관객동원의 가능성, 필름수급문제, 부산의 기후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10월이 가장 적기라고 판단했다. 협의과정에서 '추석'이 최대 변수로 등장했다. 추석대목을 피해 비수기인 추석직전이나 추석개봉 프로그램이 끝나가는 '추석 3주 후'에만 극장임대가 가능했다.

그러나 추석(9월 27일) 3주 후가 되면 날씨가 쌀쌀한 10월 말이나 11월 초가 되기 때문에 추석 직전인 9월 13~21일 9일 간으로 개최일정을 잡았다. 부산국제영화제가 1996년(1회)과 1998년(3회)에는 추석 전인 9월에, 2001년(6회)과 2002년(7회)에는 11월에 개최되었던 것도 추석이 변수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전용 상영관이 없어 매년 바뀔 수밖에 없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불규칙한 일정은 국제사회에 세계 유일의 '음력영화제'로 불렸고, 예고도 없이 남의 영화제 기간을 침범한다는 뜻에서 '게릴라영화제'라는 오명을 남기기도 했다.

일단 남포동의 극장을 모두 임대해 사용하기로 했지만 관객동원이나 축제분위기 조성에 자신이 없었다.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처럼 수영만 요트경기장 안에 야외상영관을 마련하고 '흥행 톱' 영화들을 상영해 축제분위기를 조성 한 후 그 열기가 남포동으로 옮겨 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결국 야외상영용 스크린의 전문대여업체인 스위스의 시네렌트사와 계약, 18×25m의 대형 스크린을 들여왔다. 한 푼의 돈도 아쉬웠던 그 당시, 1억5000만 원이란 거금을 들여 대형스크린을 임대해 야외 상영하는 것이 무모한 일로 비쳤지만 이제는 부산영화제의 명물이 되었다.

준비과정에서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가 정부 부산시 등 유관기관과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전적으로 내가 맡아야 할 몫이기도 했다. 나는 특히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배제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이를 고수했다.

국제영화제에 관한 인식이 전무했던 부산시의 입장은 달랐다. 시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 위크'(아시아국가 중 부산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나라의 공연단을 초청했던 행사)의 부대행사로 몰고 갔고, 민간에 맡기는 것보다 시에서 직접 추진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결정사항은 주무 계장 과장 국장 부시장 시장의 결재라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는 정치인인 문정수 시장에게 매주 정기적으로 조찬을 하자고 제의했고, 쉽게 이루어졌다. 6월 21일부터 시작된 시장공관의 금요조찬은 8월 23일까지 거의 빠짐없이 이루어졌다. 과장이 배석한 이모임에서 중요한 사항들이 신속하게 결정되고 추진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문정수 시장은 국제영화제에 대한 어느 정도 정확한 인식을 갖게 되었고, 애정이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영화제에 관한 한 모든 결정과 집행을 영화제 집행부서에 위임했다. 이러한 자율에 맡긴 결정은 영화제를 성공으로 이끈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정치인이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영화심의 문제도 심각했다. 내가 공연위원장으로 재직할 때 대전엑스포 기간에 열렸던 작은 규모의 영화제에 대해 그 심의를 면제해 준 일도 있는데 위치가 바뀌고 보니 통하지 않았다.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정부 당국의 심의를 받는 경우 그 영화제는 국제사회에서의 권위가 실추되고 만다.

나는 심의를 면제받기 위해 뛰었고, 결국은 조문진 감독을 비롯한 심의위원들이 부산에 와서 170여 편의 영화를 보고 심의하도록 부탁했다. 그 결과는 공식 문서로 교환하도록 함으로써 시간을 벌었다. 몇 편이 제한상영으로 결정되었지만 이미 예매 중이었기 때문에 양해를 구하고 후일 발생하는 법적 제재는 내가 받겠다는 전제로 제한 없이 상영했다. 크로넨버그 감독의 작품 '크래쉬'의 경우 수입사 측에서 우리와 상의 없이 문제 장면을 삭제한 후 제출했는데 이를 확인하지 못하고 상영해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개막일이 다가오면서 개막식에서의 연설을 가능한 한 없애기로 했다. 동구권의 가장 대표적인 영화제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는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개막식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해 왔다. 그는 경호원도 없이 조용히 와서 2층에서 관람한 후 프라하로 되 돌아가곤 했다.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칸영화제 50주년이나, 60주년 행사에 대통령이나 문화장관이 참석해도 이들의 연설은 없다.

나는 정치인들의 축사를 없애는 방편으로 청와대에 대통령의 영상메시지를 요청해서 이를 영화제 때 틀었다. '국가원수의 메시지'라는 것을 방패로 당시에 참석했던 국회의 상임위원장, 문화관광부 장관의 축사요청을 거절했고, 부산시장도 환영사 없이 개막선언만 하도록 했다.

개막식에서 아무런 역할이 없어진 주무장관은 그 후 몇 년이 흐르도록 부산영화제를 찾지 않았고, 대통령 영상메시지도 3회부터 없앴다. '지원은 받되 간섭은 배제한다는 원칙'의 고수와 자율성이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있게 한 것이다.
 
     -국제신문(2007.10/14)

http://columnist.org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