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61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5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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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3)


김동호 -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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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2월 13일의 창립총회를 통해 사단법인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가 정식 출범했지만 헤쳐 나가야 할 과제는 너무나 많았다.

먼저 운영체제부터 갖추기 시작했다. 인선과정에서 시와의 마찰은 있었지만 오세민 정무부시장, 박광수 감독, 주윤탁 교수를 부위원장에 위촉했고, 영화제 업무 전반을 이끌 프로그래머는 이용관(한국)과 김지석(아시아) 전양준(월드)이, 사무국장은 오석근 감독이 맡았다.

3명의 여직원을 공채했고, 홍콩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중국의 압력으로 물러난 웡 아인링(Wong Ain-Ling)과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Tony Rayns)를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위촉했다. 스위스에 거주하는 임안자(현 전주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씨와 재미교포 임현옥 씨는 프로그램 컨설턴트로서 현지에서 영화선정을 돕도록 했다. 6월 초, 국제세미나에 연사로 참석했던 샌프란시스코 아시아·아메리카영화제 집행위원장 폴리(Paul Yi)씨도 나의 집요한 설득으로 우리와 함께 일한 후 영화제가 끝난 9월 말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영화제 운영에 백지상태였던 우리에게 그의 도움은 영화제를 성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비록 역할분담은 했지만 사안에 따라 '올인'하는 자세로 일했다. 영화 작품 선정과 대외홍보도 시급한 과제였다. 박광수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과 나는 홍콩영화제에 참가했고, 싱가포르영화제에 부탁해서 오석근 사무국장과 직원 1명을 파견, 자원봉사진으로 근무하면서 영화제 운영 전반을 배우게 했다.

5월 8일, 우리는 칸영화제 행사장으로 달려가 영화를 선정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3일 뒤 칸영화제의 피엘 리시앙, 막스 테시에, 낭트영화제의 알랭 잘라도, 베를린영화제의 울리히 그레고르, 뮌헨영화제의 클라우스 에더, 로테르담영화제의 사이먼 필드와 바우터 바랜드레히트, 몬트리올영화제의 세르즈 로직 등 주요 영화제의 집행위원장들을 오찬에 초대하여 협력을 구했다. '버라이어티' 기자를 포함해 15명이 프랑스 전통음식점 '가브로슈'에 모였고, 이들은 모두 부산에 오겠다고 약속하면서 축배를 들었다. 대부분이 나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이었지만 감격스러웠다. 이 모임을 통해 영화제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성공을 예감할 수 있었다.

영화제의 협력체제 구축도 필요했다. 서울 필동에 있는 집으로 영화단체장들을 초청해서 협력을 부탁했다. 바로 몇 주일 전, 이들 영화 관련 단체장은 조순 서울시장에게 1997년에 개최하고자 하는 서울국제영화제가 '영화제 관계자들과 사전협의 없이 결정됐고 시기상조'라고 강력하게 반대해 무산시킨 바가 있다. 이런 와중에 이들은 몇 달 후에 부산국제영화제를 개최하겠다는 내 설명에 무척 난감해 하면서도 끝내 협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사전에 의견을 조율한 후 문정수 시장은 5월 17일 이들을 서울 신라호텔 만찬에 초청,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이 자리에서 곽정환 서울시극장협회 회장은 부산에서의 촬영지원을 조건으로, 강대진 전국극장협회 회장은 조건없이 1억 원을 협찬하기로 약속했으나 강대진 회장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6월 4일에는 조직위원회의 현판식을, 6월 5일에는 경험 있는 해외인사들을 초청해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부산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열린 세미나는 급히 동원된 이용관과 김지석의 제자들로 자리를 반쯤 메워야 했다.

무엇보다 다급한 것은 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준비작업은 정신없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자금은 절대 부족했다. 우리는 있는 돈을 다 털어 넣었다. 이용관과 김지석은 대학에, 나는  케이블방송사에 나가고 있었기에 가진 돈을 몽땅 행사준비에 투입하고도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부산시의 지원은 3억 원에 그쳤다. 그 돈도 2억 원은 6월 15일에, 나머지 1억 원은 7월 9일에야 받을 수 있었다.

협찬을 받기 위해 발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먼저 대우영상사업단의 정주호 부사장과 몇 차례 만나 가능성을 타진 한 뒤 박광수 감독과 함께 대우개발 정희자 회장을 찾아가 후원을 부탁했다. 그 자리에서 정 회장으로부터 8억 원의 지원약속을 받았지만 그룹회장단의 반대에 봉착, 우여곡절 끝에 3억 원으로 결정되었다. 고교후배인 중앙산업의 조규영 회장이 1억 원(배우 정윤희 명의), 서울극장의 곽정환 회장이 1억 원(고은아 명의)을 협찬했다.

문정수 시장의 결단으로 7월 24일에는 부산에서, 8월 29에는 서울에서 각각 모금행사를 열었다. 서울에서 김지미 윤일봉 남궁원 강수연 임권택 등 영화인이 참석하고 김동건이 사회를 본 부산행사에서 고려산업 동성화학 진영수산 동성여객 자유건설 우성식품 적고(현 유니크) 태화백화점 등 8개 기업에서 2억 원, 그밖의 기업과 개인의 성금으로 2억 원이 모아졌고, 뒤늦게 파라다이스호텔 한일그룹 삼성 제일제당이 각각 1억 원을 보탰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입장료수입 4억 원을 포함, 22억 원을 확보해 적자 없이 첫 영화제를 치를 수 있었다.

       -국제신문(2007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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