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59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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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의 어제와 오늘(1)


김동호 -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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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18일 오전 10시, 중앙대 이용관 교수의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인 서울 시청 앞 프라자 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다. 그곳에는 뜻밖에도 이 교수뿐만 아니라 부산예전의 김지석 교수, 영화평론가 전양준 씨, 공연기획사 '열린판'의 김유경 사장 등 여럿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뜸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면서 그 '선장'격인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부산파라다이스호텔로부터 5억 원의 협찬을 약속받았다는 말도 곁들였다.

갑작스러운 제의에 우선 망설임부터 앞섰다. 불과 1년 전에 환경영화제를 하겠다는 젊은 사람들의 말을 믿고 관여했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저것 되짚어 보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의 설득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굳은 의지가, 그들의 말에서는 뜨거운 열정이 넘쳐났다. '한번 믿어보자.' 그렇게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나는 33년 6개월의 공직 또는 준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6개월째 '백수'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우선 새로운 일에 뛰어들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제영화제에 관한 한 그들과 '코드'가 맞는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라면 한 번쯤 모험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 자신 국제영화제에 관한 체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영화진흥공사(지금의 영화진흥위원회) 사장 시절에 참가했던 두 번의 몬트리올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가 전부였다. 그러나 두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아다다'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의 여우주연상(신혜수와 강수연) 수상을 계기로 국제영화제의 역할과 그 파급효과를 생생하게 체험하면서 국제영화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런 체득을 통해 나는 온 힘을 쏟아 남양주종합촬영소 조성에 나섰다. 촬영소가 완공될 즈음 국제영화제 개최를 타진하기 시작했다. 1991년 12월 23일, 그 분야의 전문가인 김수용 임권택 이두용 하명중 배창호 박광수 장선우 박기용 감독, 영화평단과 언론계의 이영일 정용탁 유지나 윤호미 정성일 정중헌 김량삼 박건섭 등을 영화진흥공사에 초청, 국제영화제에 대한 토론회를 갖고 의견을 들었다.

국제영화제 개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한참 뒤인 1994년 무렵이었다. 이 해 1월 25일 문화체육부에서는 대통령업무보고를 통해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서울국제영화제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5월 13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주최, 문화체육부 후원으로 '서울국제영화제 창설을 위한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공론화 과정에서 '필요성은 공감하되 시기가 이르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이긴 하지만 당시 서울영화제가 추진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해도 부산국제영화제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서울의 움직임과 거의 때를 같이해 부산에서도 국제영화제 창설 움직임이 조용히 일고 있었다. 1992년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의 한국영화 특별전에 참가했던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 세 사람은 큰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그들은 우리도 부산에서 페사로영화제처럼 '작지만 좋은 영화제'를 만들자고 뜻을 모았다. 이후 몇 차례의 준비모임을 가졌고 그 과정에서 나를 찾게 된 것이다.

내가 이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배경에는 '부산'에 대한 남다른 '향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서울로 이사했기 때문에 강원도 '감자바우'인 동시에 '서울내기'다. 그런데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6·25가 터졌고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란왔다.

누구나 겪었던 피란생활이었지만 우리집은 봉래동의 피란민수용소를 시작으로 보수동 수정동 범일동 용호동을 전전했고, 행상과 노점상을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다. 범일동과 용호동에서 서대신동 구덕산 중턱에 마련된 천막교사까지 매일 달리는 트럭과 기차에 뛰어 오르고, 내리는 곡예를 하면서 무임승차로 학교를 다녔다.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피란생활이었기에 지금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새겨진다. 특히 청소년기를 보냈던 부산의 4년은 나에게 '비록 어떤 난관에 처할지라도 혼자 뚫고 나갈 수 있다' 는 의지와 자신감을 갖게 해 주었다.

이런 추억이 담긴 부산에서 부산을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매력적인 일로 다가왔다. 이렇게 해서 나는 부산국제영화제 창설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1995년 8월의 회동을 기점으로 나의 인생항로는 서서히, 그리고 급격하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국제신문(2007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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