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58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2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딴 글 보기 | 거시기 머시기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홈)
어쩔 수없이 된 된장녀
우혜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hazelwoo


아 이제 나는 생사고비를 넘겼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고맙다. 지난 2주 정도는 정말 더웠다. 30도가 넘는 더위가 온다는 것을 알고 에어컨을 좋아하지도 않는 나는 에너지 절약도 할 겸 더위를 피할 계획을 미리 세웠다. 서울에서의 피서 계획인 셈이다.

우선 산으로 갔다. 그러나 계곡에는 이미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거나 누워 있었다. 또 내가 올라간 산에는 울창한 큰 나무가 없어 쉴 그늘이 별로 없었다. 높은 곳 겨우 바위와 나무 사이에서 약간의 바람을 느끼며 더위를 피했다.

다음은 도서관을 찾아보았다. 인터넷 서치도 하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도서관행을 시도했다. 나는 어른들이 그냥 들어가 신문도 보고 회원이거나 신분증만 있으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도서관으로 생각했으나 서울의 도서관은 학생들의 공부방이 안 되려고 애쓰는 무엇도 안 되고 무엇도 안 된다는 그런 장소였다.

그리고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거나 강변이나 공원에 건축학적으로도 아름다운 멋진 공공 도서관 건물을 떠올렸으나 내가 간 도서관은 산중턱에 있었고 다른 도서관은 찾기가 어려워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자료를 찾을 수 있는 도서관이 시내에 있다하여 갔으나 점심시간에는 또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된장녀가 되었다. 커피숍에 앉아 소위 공공의 적이 되다시피 한, 그것도 늙은 된장녀가 된 것이다.  한 낮에는 열섬현상으로 거의 40도로도 느껴지는 살인적 더위를 피하려면 늙은 된장녀라고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고 봐야 했기 때문이다. 커피숍은 좋은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찾기도 쉽고 에어컨도 세게 나와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런데 오래 머무르기가 눈치가 보였다. 인터넷에서 요즘 커피숍에서 책을 펴놓고 몇 시간씩 죽치는 된장녀에 대한 비판의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서늘한 다리 밑으로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할아버지들이 장기나 바둑을 두고 있다. 할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 더위에. 장기도 바둑도 못 두는 나는 아마 언젠가는 더운 여름 날 할머니 된장녀가 되어 늙은이가 비싼 외제 후식을 먹는다고 욕을 먹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오래 전 여름 스페인 포르투칼 그리스 이탈리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거기는 그냥 여름 온도가 보통 40도이다. 그래서 낮에는 지나가다 공원에 가 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몇 시간 땡볕을 피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 오아시스 같은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힘들었던 낯선 여행지에서 나를 보호해주었던 커다란 숲, 외국인인데도 나를 그냥 받아 주었던 파리나 런던의 시내 공공도서관은 왜 서울에 없는 것 일까? 경제규모 세계 몇 위, 일인당 지엔피가 몇 위 하면서 왜 시내 공원과 도서관 크기와 이용객 숫자, 연령별 분포 등은  세지 않는 것일까?

한 여자대학 앞에는 이 대학 학생은 모두 된장녀다 라는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조그만 방을 함께 쓰는 여대생들은 바람이 통하지 않는 방에 있을 수 가 없어 카페에 들어가 무더위를 이기며 책을 보고 공부도 한다. 자취생들이 많은 한 대학의 부근 도너츠 가게에서도 여대생이 영어공부를 하고 있었다. 자취방보다도 시원한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의 여름나기는 더운 날씨와 더불어 일방적인 매도 분위기 때문에 더욱 힘들다. 올림픽 중계 해설자마저 올림픽에 출전한 훌륭한 선수들을 향해 너는 왜 그렇게 밖에 못하니, 이렇게 해야지, 그러면 안 되지 뭐 이런 식이다. 그렇게 하는 배경을 분석하고 그 전략을 살펴보는 일이 해설자의 몫이다. 선수를 매도하기 전에 자신들이 분석력을 키워야 할 일이다. 더운 여름에 내가 커피숍에 간 이유는 분석할 필요도 없이 간단한 이유에서이다. 비싼 외제 후식을 마시며 폼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우는 찜통 같은 날씨에 집에서 에어컨을 안틀면 나가 쉴 공원도 없고 도서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에어컨이 잘 나오는 회사에 다녀 냉방병에 걸려 약을 먹고 있는 분에게 나는 왜 서울에서는 여자가 커피 마시는 꼴을 못 보나요 하고 물었다. 건물주가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주는 곳에서 일하는 한 분이 대신 이렇게 답했다. 여자가 왜 밖에 있느냐는 것 아닐까요, 집에서 밥하지. 아, 밥하기에도 정말 무더운 여름이다.

- 2008.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