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57 [칼럼니스트] 2008년 8월 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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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 피서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어디로 떠날까? 어디서 잠을 자고 무엇을 먹을까? 피서철이면 늘 하는 걱정이다. 유명관광지와 바다는 인파로 붐비고 휴양지는 편리한 만큼 비용이 많이 드는 게 흠이다. 올 여름 피서는 '물가폭탄시대'를 반영하듯 에어컨이 빵빵한 사무실에서 보내는 실속파 직장인이 많다. 휴가까지 가서 직장 상사 만날까 봐 꺼리던 회사콘도 이용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몇 해 전부터 연례행사로 진행해온 형제자매 가족들의 피서모임을 충북 단양에서 가졌다. 소백산 도솔봉과 묘적봉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작은 폭포와 소(沼)를 이루며 흘러내려 내를 이룬 사동계곡 들머리다.
육 남매 가운데 위로는 누님 네 분, 막내 남동생이 환갑나이니 '가지를 친' 식솔들은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손자뻘들은 누구네 몇째라고 '소속'을 밝혀야 안다. 올해는 예상을 뒤엎고 여든을 넘긴 큰 누님부터 젖먹이 증손까지 59명이 참여한 대가족 피서가 됐다.

핵가족 시대에 잔치 집 마냥 붐빈 피서지의 이색풍경은 살기가 팍팍할수록 가족을 찾는다는 말을 실감한다. 2박3일 끼니를 때우는 일도 만만찮다. 식사는 펜션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문해 먹어 수월했으나 술안주와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한낮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도 이산화탄소로 범벅이 된 도시의 공기와는 달리 상큼하다. 술을 마시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면 냇가에 나가 풍덩 몸을 담그면 금새 서늘해진다. 젊은이와 아이들은 반두를 가지고 나가 물고기를 잡는 그야말로 옛날 식 피서다.

기상청의 주말예보가 6주 연속 빗나간 덕택에 뭉게구름 두둥실 떠다니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니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삶은 돼지고기를 묵은 김치에 싸먹는 맛도 쏠쏠하고, 푸짐하게 삶은 옥수수와 감자를 먹으며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을 보니 어린 시절로 되돌아 간 느낌이다.
이른 아침 앞산 골짜기로 곰실곰실 물안개 피어올라 산수화를 그려 놓고, 냇가에는 노란 달맞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활짝 웃는다. 한낮엔 꽃잎이 오므라들었다가 밤이면 그리움으로 마음을 여는 달맞이꽃은 귀화식물이지만 월견초(月見草)란 이름까지 붙었으니 야생화로 뿌리를 내렸다.

나른한 한낮엔 밀짚모자를 쓰고 반바지차림으로 맑은 물에 발을 담그니 차가운 기운이 전류처럼 짜릿하게 온 몸에 퍼진다. 이경윤이 그린 '고사탁족도(高士濯足圖)' 속의 선비가 부럽지 않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며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를 읽으며 떨쳐버리지 못한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는다.  

아등바등 살아오면서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곱게 늙어 건강하게 살다가 세월의 무거운 짐 훌훌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지 생각하면 두렵다. 피붙이들의 살가운 정을 확인하며 탁족과 독서로 마음의 때까지 씻어낸 대가족피서이기에 넉넉하고 푸근하다.
-교차로 8월 8일자(2008년)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