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56 [칼럼니스트] 2008년 7월 3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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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에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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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달 전 끔찍한 일을 겪었다. 서울 외곽 어느 산자락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난 뒤 일행 중 한 명이 쓰러진 것이다. 그런 사례를 많이 듣긴 했지만 직접 겪는 건 처음이라 나머지 우리 세 명은 적잖이 당황했다.

무슨 조짐이라도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대화를 나누다가 갑자기 졸린 사람처럼 눈을 감고 옆으로 슬그머니 쓰러지더니 냅다 코를 고는가 하면, 눈동자가 뒤틀리며 걷잡을 수 없이 토하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사람의 모양이 변했다. 한 명은 119로 연락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 환자를 지키며, 나는 나가서 집주인을 찾았으나 잠깐 이웃을 갔는지 안 보였다. 종업원도 심부름 가고 없었다.

이처럼 뜻하지 않은 돌발상황이 발생하니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첫 번째가 119와의 소통이었다. 주변에 특징 있는 건물이나 지형지물이 없고, 길도 골목을 겨우 면한 정도라 설명하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밤이었다. 구급대도 오면서 두 번씩이나 위치를 되물었다. 아파트나 대형건물이 아닌 곳에서 발생하면 이런 어려움을 당연히 겪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응급처치였다. 우리들은 웬만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할 만한 나이인데도 막상 닥치니 속수무책이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순간순간 엄습하는 듯한 두려움 앞에서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환자의 머리를 높여주는 것이 맞는지 낮추는 것이 옳은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구급차가 어렵사리 도착하자 마치 구세주를 만난 것 같았다. 우리는 구급대원 지시에 따라 행동한 뒤 둘은 보호자 겸해서 구급차를 탔고, 한 사람은 뒷처리를 한 뒤 병원으로 오도록 했다.

세 번째 문제는 응급실에서 환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등을 기재해야 하는데 주민등록번호, 주소를 알 길이 없었다. 환자 소지품을 조사하면 되는 게 상식이지만 응급처리 중이라 그런 것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으로 환자의 휴대전화가 우리에게 있어 그걸 가지고 가족들에게 연락을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전화번호만 보고는 누가 가족인지 알아내기 어려웠다. 단축번호 1번부터 10번 이내가 가족이나 가까운 사이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전화를 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다.

잇달아 도착하는 응급환자들과 우리처럼 정신없이 뛰는 사람들로 밤의 응급실은 영화에서 본 전쟁터의 야전병원 그대로였다. 이렇게 경황이 없을 때 구급대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를 도와주었다. 문자 그대로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런 뒤 정신을 좀 차리고 보니 구급대원들이 가고 없었다. 세상에,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도 아직 못했는데...

환자는 며칠 뒤 세상을 떴다. 미세한 뇌출혈이지만 뇌 깊숙한 곳에서 터져 수술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그랬지만 그토록 성실하게 대응해준 구급대원들은 잊을 수 없었다. 인사 한 마디도 못한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얼마 전 119구급대원들이 환자나 보호자한테 맞는 일이 빈번하다는 보도에 깜짝 놀랐다. 소방본부 관계자는 "주로 야간시간대 술에 취한 사람을 이송하는 과정에서 폭행사건이 발생한다"며 "그렇다고 다친 사람을 병원에 데려다 주지 않을 수도 없어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가해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이유는 도착이 늦었다거나 불친절하다는 것. 그러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않아 여기저기 물어가며 가까스로 도착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늦었다며 마구 때리는 경우도 있다"고 푸념했다. 또 남성대원이 함께 있어도 옆의 여성대원만 골라서 때리는 일도 있다고 한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나 예민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열심히 찾아온 구급대원들 처지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폭력을 행사는 것은 만행이다. 우리 사회 수준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런 이들은 구급대의 봉사를 요청할 권리나 자격이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피서철이다. 피서지에는 막무가내인 이들이 많고, 거기에 술까지 마셔 도저히 못 말리는 꼴불견들이 속출한다. 119가 더욱 바빠질 것이 뻔하다. 이런 경우를 대비한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역설적으로 119를 구급하기 위한 방안도 함께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행정공제회 '웹진' 7월호(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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