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50 [칼럼니스트] 2008년 7월 1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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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누나의 수틀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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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였는지 누나의 수틀에는 진전이 없었다. 수놓으러 간다고 이웃에 마실을 다녀왔는데도 그대로인 때가 허다했고, 집에서 동네 다른 집 누나들과 모여 수틀을 붙잡고 앉았어도 시늉만으로 그치는 날이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아침에 일어나면 맨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누나 수틀이었는데 그런 꼴이니 은근히 불만이 생겼다.

수놓은 것을 모아서 시장 옷가게에 갖다 주면 돈을 받고, 새 수본을 받아오는데 나도 가끔 따라갔다. 그 돈으로 내게 이것저것 사주는 맛도 괜찮았다. 그러나 내가 불만인 것은 그 재미를 보지 못한 것보다 다른 데 있었다.

나는 누나들이 놓는 수틀의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을 즐겨 구경했다. 한 땀 한 땀 바느질 따라 예쁜 그림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이런저런 참견도 했다. 그러면 나보다 10살쯤 많은 누나들은 사내녀석이 별걸 다 아는 체 한다고 핀잔을 주었지만 재미있는 걸 어찌하랴.  

그런데 누나는 없고 수틀만 팽개쳐진 상태가 한 동안 계속되니 속으로 성질이 났다. 꼭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다 만 것처럼 아쉬웠다. 그러나 누나는 끝내 수틀을 다시 붙잡지 않았다.다른 동네 총각과 바람이 난 것이었다.

우리 집은 그 때문에 풍파 그칠 날이 없었다. 50년대 후반 한국전쟁의 아픔이 아직 아물지 않았던 당시 사회와 사람들 정서는 그런 식의 사랑에 우호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창 인기 있던 유행가의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미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처럼 버리긴 버렸는데 누나가 버린 건 수틀이었다.

그렇게 싹튼 정분이었지만 누나의 사랑은 자기가 수놓던 꿈처럼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비련의 상처는 누나의 평생을 지배했다. 20년 전 누나가 불운했던 한 생을 마감하던 날 그 팽개친 수틀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지금도 땀땀이 정성스레 수놓던 일을 중도에서 팽개친 것이 불운의 조짐이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일생을 수놓을 수틀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거기에 어떤 그림을 어떤 색으로 어떻게 수놓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수틀에 수본을 끼우고 바느질 해나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땀땀이 수를 놓으면서 정열을 얼마나 쏟고 땀을 어떻게 흘렸는지에 따라 결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

그리고 꾸준히 끈기로 작업을 해야 한다. 아무리 급해도 단번에 두 땀을 바느질할 수는 없다. 건너뛰어서도 안 된다. 그러면 당장은 진전이 있는 것 같지만 마쳐놓고 보면 뒤틀리거나 어느 쪽이 울어 결국 처음부터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과거 서당에서는 건너뛴다는 의미의 엽등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날그날 배운 것을 확실히 하고 다음 날 복습에서도 틀림없어야 다음 단계로 나갔다. 같은 서당에서 읽는 부분이 서로 다른 것은 개인별로 진도에 차이가 난 때문이었다.

왕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하들이 선생이었지만 배운 것을 완전히 체득하지 못하면 완전히 알 때까지 되풀이시켰다. 유클릿의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각자 일생을 수놓는 작업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이런 원칙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아 도중에 수틀을 내팽개치거나 어찌어찌 끝이라고 맺기는 했지만 영 불만스러운 사람들이 많다. 아니 그 원칙에 따라 산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누나는 수틀을 버리고, 사랑이 실패로 끝난 뒤 이런저런 직업을 가졌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초반에 잃은 본전 생각이 난 노름꾼처럼 몇 차례 건너뛰기를 하면서 만회를 노렸지만 세상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반면 가까운 고등학교 친구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이어받았다. 마지못해 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이를테면 수틀에 수본을 끼울 때부터 목표가 분명했다. 이농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60년대 이웃들이 버리다시피 내놓은 전답들을 계속 사들여 가며 상당한 농장규모로 키웠다.

그의 말대로 소처럼 일했다. 결혼도 일찍 해 일 잘할 여자를 맞아 들였다. 그리고 40 여 년 동안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외길을 걸었다. 농촌경제가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아 식은땀을 흘린 적이 한 두 번 아니었지만 땅과 가축에 대한 믿음과 열정의 땀으로 이겨냈다.

60이 넘은 지금 그는 아직도 열심히 일하며 백수가 된 친구들과는 대조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삶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 그에 대해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가치판단이 있을 수 있지만 본인이 만족하게 생각하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고교를 졸업하고 농촌으로 돌아간 친구는 그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은 대개 실패했다. 즉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간 것이 아니라 우리 누나처럼 수틀을 중도에 팽개치거나 계속하더라도 건너뛰기 하다 그랬다. 원리는 간단하지만 충실한 실행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른조달 여름호(2008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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