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36 [칼럼니스트] 2008년 5월 3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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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한테 물어봤자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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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컴퓨터 보충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였다. 50대 중반 이상의 고령자들은 대개 몇 가지 제한된 기능만 단편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기초부터 체계적인 보충교육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간 것이다.

그러나 기억력이 많이 쇠퇴한 터라 어제 배운 것을 오늘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너무 당연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고, 바로 전 시간에 배운 것도 금시초문인 경우가 허다해 여기저기서 세월과 나이를 한탄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스위시 단계로 들어가서는 앉은자리에서 까먹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다행히 강의를 담당한 선생님들이 60대 후반의 나이 드신 분들이라 수강생 처지를 잘 이해해 차근차근 이끌어주셨다. 그리고 집에 가서 하다가 막히면 자신들한테 언제라도 연락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것 한가지만은 절대 잊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다. 그건 다름 아닌 "자식들한테는 묻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식들한테 물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르쳐주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가르쳐주더라도 쉽게 습득이 되지 않아 결국 부모자식간 싸움만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농담반진담반으로 하는 말에 모두 웃었지만 쓴웃음이 더 많았다. 그건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그런 적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플로피 디스크시대가 가고 CD가 대세를 이룰 무렵,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입맛이 썼다.

물론 컴퓨터에서 자식 덕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에 선생님은 그처럼 당부하신 것이다. 그 대신 컴퓨터 다룰만한 손자가 있는 사람은 용돈, 선물 등으로 '아첨'을 하거나, 살살 달래며 배우도록 하라고 해서 우리들은 더 크게 웃었다. 부모자식간은 삐걱거려도 조부모와 손자간은 아직은 괜찮은 편이라는 것이다.

IT시대가 되면서 인류사상 최초로 선생과 학생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부모자식간도 비슷하다. 과거에는 선생이나 부모가 배웠던 지식과 경험을 후배와 자식들이 뒤따라서 배웠는데 지금은 새로운 정보를 뒤 세대가 더 빨리 습득하므로 앞 세대 지도력은 자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핵가족 사회가 되면서 가족관계가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는데, 정보화 측면에서 앞 세대의 강점이 무력화하다 보니 부모와 노인들 설자리가 더욱 좁아지고 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앞 세대의 말이 문자 그대로 '가르침'이던 것이 이제는 한낱 귀찮은 잔소리로 취급되는 것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자칫하면 조롱거리로 전락하게 될 판국이다.    

농촌지역 노인들 처지도 별로 나을 게 없다. 아니 도시보다 더 심각하다고 한다. 어른들의 경험과 감각에 의존하는 정도가 매우 높았던 농사가 완전 탈바꿈해 그런 것들이 이제는 거의 필요 없거나 도리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농약 등 농사에 필요한 제품들이 온통 영어, 외래어로 맥질해서 노인들이 무슨 말인지 헷갈린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고, 날로 진화하는 농기계도 손을 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을 통한 영농기법 습득은 더더욱 어려워 산 넘어 산이다.

젊은이들이 없으니 돌봐 줄 손자도 없다. 마을의 느티나무처럼 경험과 기품을 살려 집안을 돌보고 이끌어 나가던 노인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옛부터 가족끼리 직접 교육은 어려웠다. 그래서 자식은 바꿔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부부간 운전교습을 하다가 가정파탄 지경까지 이른 집도 없지 않다. 따라서 컴퓨터를 두고 자식과 부모간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경제적, 사회적으로 급속히 소외돼 가는 노인들이 정보화에서도 이처럼 뒤져, 역할이 거세되어 가는 현실은 매우 안타까운 노릇이다. 이것이 고착화하면 고령자들 당사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간단치 않는 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사회적 장치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어버이 날이라고 해서 노인들 가슴에 꽂힌 카네이션보다 더 시급하고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점이 아닐까 한다.

     -행정공제회 '웹진' 5월호(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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