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34 [칼럼니스트] 2008년 5월 2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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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섬 붉은게
김소희 (수필가, 동물 칼럼니스트)
http://columnist.org/animalpark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섬이 있다. 새하얀 눈이 뒤덮인 곳, 혹은 산타가 사는 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열대기후에 위치해 눈은 없다. 이 섬이 발견된 날이 1643년 성탄절이어서 지은 이름이다.



매혹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이 섬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 펼쳐진다. 온 세상이 ‘움직이는 새빨간 양탄자’로 뒤덮여 버린다. 마법이라도 일어난 듯 나무, 땅, 바위, 모든 것을 훑고 지나가는 이 양탄자의 정체는 ‘게’다.

이 섬에는 1억여 마리가 넘는 붉은게가 살고 있다. 정식 명칭은 ‘크리스마스섬붉은게’(Christmas Island red crab). 신기하게도 이 게들은 물 속이 아닌 육지, 그것도 숲 속에 산다. 다른 게들과 마찬가지로 아가미로 호흡하기 때문에 수분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해 죽는다. 습기가 많은 숲 속, 그것도 땅 속 구멍에서 살아가는 이유다. 가정집 정원에 정착해 사는 녀석들도 있다고 한다.

11월 우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숲 속의 붉은게 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밖으로 모두 나온다. 바다로 가기 위해서다. 비 덕분에 마음껏 숨을 쉴 수 있어 먼 여행 길에 별 문제가 없다.

그들은 왜 바다로 가는 것일까? 짝을 짓고 알을 낳기 위해서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은 기본이요, 험난한 계곡과 바위,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 가정집 베란다, 사람 발등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곳을 떼 지어 건너느라 섬은 온통 붉은 물결을 이룬다. 이 무렵이면 멋지고 아름다운 ‘붉은 행렬’을 담기 위해 수많은 사진작가들이 이 섬을 찾는다.

그렇다고 숲을 떠난 모든 게들이 바다까지 무사히 가진 못한다. 각종 천적에게 잡아 먹히고,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다가 차에 깔리고, 사람한테 밟히고, 때론 수분이 모자라 질식해 죽기도 한다. 이것을 안타까워한 이곳 주민들은 6~8km나 되는 험난한 여정을 돕기 위해 아스팔트 위로 올라온 게들을 옮겨주고, 차량을 통제하며, 자기 정원을 점령해 버린 게들에게 물을 뿌려준다.

드디어 바다에 도착. 하지만 이들 중에도 다리가 없거나 몸이 찌그러진 녀석들이 즐비하다.

짝을 만나고 알을 낳고, 긴 여행의 목적을 이룰 때쯤이면 ‘붉은 물결’은 이제 반대편으로 몰아친다. 그리고 우기가 끝나는 2~3월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세상은 조용해진다. 우기가 다시 시작되면 또 다시 놀라운 마법이 펼쳐지겠지.

<정보>크리스마스섬 붉은게

인도양에 있는 호주령 크리스마스섬에 사는 육지게의 한 종류. 크기는 10~12cm인데,보통 수컷이 암컷보다 좀 더 크다. 떨어진 나뭇잎과 씨앗,열매,꽃을 먹고 살지만 경우에 따라 지기 종족을 먹거나 작은 동물을 먹이로 삼기도 한다. 최근 우기가 짧아지고 가뭄이 계속되는 이상기후들이 나타나면서 수많은 게들이 죽어가고 있다. 몇 년 후면 이 아름다운 행렬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소년조선일보 2008.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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