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27 [칼럼니스트] 2008년 5월 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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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소설에 대한 추억
우혜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hazelwoo


소설가 박경리란 이름 석자가 잡지나 신문에 나오면 지나치지 않고 꼭 읽어보게 된 것은  중학교시절 소설대여점에서 그의 소설을 읽게 된 이후이다. 요즘은 초등학교로 불리지만 그 때는 국민학교로 불리던 시절 만화 라이파이에 심취해 학교만 갔다 오면 동네 만화방을 찾던 나는 드디어 중학생이 되어 학교 도서실에 가니 책을 빌려볼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제비 양과 하늘을 비행기로 날며 악의 무리를 쳐부수는 정의의 사도 라이파이는 그곳에 없었다. 드디어 나는 어른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도서실 말고 다른 곳에서 책을 빌려 읽고 있었다. 학교 입구에 조그만 책 빌려주는 곳이 있었다. 거기에 가면 손때가 묻은 소설책들이 꽂혀있었고 나도 아이들 따라서 그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제목만 보고 한 권 빌렸다. 주홍글씨 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나타니얼 호오돈.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독서 감상문 숙제가 떨어졌다. 읽은 것이 주홍글씨라 숙제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어서 앞 장과 뒷장에 나와있는 책소개인지 비평인지를 보며 위정자 라는 단어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거기에 있기에 위선이라는 낱말과 함께 베껴 냈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만화를 읽던 나로서는 무척 힘든 숙제였다.

그러다 집어 들게 된 것이 아마 김약국의 딸들이었을 것이다. 제목이 알 것 같지 않은가? 너무 확실한 제목 아닌가 말이다. 그 소설을 쓴 작가가 박경리였다. 읽어보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그 책방에는 여성작가들의 책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아마 도서실에 비치하지 않는 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얘기 가족얘기가 많았다. 그것이 그 때는 밖으로 해서는 안되는 이야기였을까?

그 중에서 박경리의 표류도, 시장과 전장, 파시 이런 제목들은 참 멋있어 보였다. 그 시대에서는 매우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고 만화에는 등장하지 않는 단어였다. 또 박경리의 소설을 통해 여성이 어머니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여성, 자아를 지니고 살아가는 여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씨에게 라는 제목도 기억이 난다.

결국 소설의 세계에 빠져든 나는 세계문학전집을 사달라고 하여 내 방 책장에 가득 채워놓고 죄와 벌, 적과 흑 이런 중후한 제목을 바라보며 언젠가 읽어야지 하다가 결국은 읽게 된다. 이 결과인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교내지에 우리 반을 대표해서 조그마한 소개 글을 실으라는 소리를 선생님으로부터 듣게 되는 영광을 얻었고 공개적 글쓰기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운 좋게도 나의 대학입시 때는 작문이 있었다. 제목이 볼펜이었던가 였는데 마침 나는 아버지께서 사주신 볼펜인지 만년필인지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 얘기를 썼다. 글 쓰는데 대한 두려움이 없어 힘들지 않았다. 많이 읽으면 스토리 전개를 할 수가 있게되는 모양이다.

내가 박경리 소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토지 1부가 완간이 되었을 때 이었다. 주위에서 재미있다고 하기에 짬을 내 읽었다. 나는 그 작품이 좋을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대단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소설대여점에서 박경리의 소설을 집어들었던 것은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박 뭐래는 여성작가가 당시 베스트셀러 인기 작가였으나 그 이름은 이제 기억되지 않고 박경리라는 이름은 이제 죽고 나서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살아남았다. 나는 허름했던, 그 헌 종이냄새로 가득했던 좁다란 소설대여점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박경리의 작품을 읽고 자라나 행복했던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2008.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