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25 [칼럼니스트] 2008년 4월 2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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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참해도 무방한 경조사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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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경조사가 발생하면 누구나 겪는 고충이 있다. 남의 경조사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다가 자기가 치를 때쯤 되어서 동창회 등 모임에 나오거나, 느닷없이 친한 척 하면서 술 한잔하자는 이들의 경우 가야할지 말아야할지 갈등이 생긴다. 이름은 긴가민가하고 언제 어디서 인연이 닿았는지 기억도 전혀 나지 않는데 참석해 달라는 불편한 초대를 받았을 때는 더욱 난감하다. 결혼철인 봄이 되자 이같이 달갑지 않는 사례들을 놓고 불평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며칠 전 가까이 지내는 한 이웃도 이런 고충을 내게 털어놓으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의 중학 동창 중 한 사람이 자기 아들 결혼식을 한다고 연락이 왔는데 너무 몰염치하다는 것이다. 그 친구 경조사가 그 동안 네 번이나 있어서 자기는 꼬박꼬박 갔고, 특히 초상 치를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을 봐주기도 했는데 지난 해 자기애 결혼식에는 오지도 않고 그 뒤로도 가타부타 말 한마디 없었다.

그러면 두말할 필요 없이 무시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마음속은 이미 그렇게 결정하면서도 괜히 찜찜하다는 것이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갔다. 빈총도 안 맞니만 못하더라고 처음부터 모르면 몰라도, 알고도 모른 체 하려면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못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문서당에서 들었던 예상왕래(禮尙往來)라는 말을 들어 그런 경우 가지 않아도 될 근거로 제시했다. 사서오경의 하나인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예는 가고 오는 것을 숭상한다(최우선으로 삼는다). (내가)갔는데 (상대가)오지 않으면 예가 아니고, (상대가)왔는데 (내가)가지 않는 것도 예가 아니다'(禮尙往來. 往而不來, 非禮也. 來而不往, 亦非禮也.)라는 말이 나온다. 선생님은 이 말이 다양한 뜻과 가치를 포함하고 있어서 경조사에도 그대로 적용 된다고 했다.

즉 남의 경조사에 내가 갔는데(또는 뜻을 표했는데), 다음에 그가 오지 않는 것이나, 거기서는 왔는데 내가 가지 않는 것은 더불어 상종할 수 없는 실례로 취급했다. 부조금(또는 물품)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고받는 액수를 같게 했다고 한다. 철저히 준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었다. 요즘의 give and take 정신이 그때도 철저했던 셈이다.

내 집 경조사에 오지 않았던 상대가 일을 치르게 되었을 때는 설령 알아도 가지 않았다. '당신이 오지 않았는데 나는 왜 가야 해' 하는 식의 좁은 속이나 야박한 인심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다. 상대가 어떤 연유로 오지 못했는지 몰라도 그 이후 내게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을 텐데 이쪽에서 참석하면 그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므로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약간 아전인수격 풀이 같지만 그래도 그 완곡한 면이 그럴 듯 하다.

지금이야 이렇게 미안하기는커녕 어떻게든 적게 주고, 많이 받자는 장삿속 철면피들까지 횡행하는 세상이니 굳이 그렇게 이유를 에둘러 대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내키지 않는 경조사에 불참할 때 찜찜한 마음을 달래는 근거로 '예상왕래'는 충분한 역할을 해줄 수 있다.

조상 대대로 한 마을에 살던 시절에 적용되던 경조사 기준이 오늘날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지금이야 사는 동네, 회사 등이 자주 바뀌니 '준 만큼 받거나, 받은 만큼 주는' 예전의 '예상왕래'를 그대로 실현할 수 없다.

물가변동속도가 빠르니 받은 만큼 보내거나 보낸 만큼 받는 것도 쉽지 않고, 사람들이 다른 지역은 물론 외국으로 이사 가는 일이 잦고 활동범위가 넓어 경조사 발생 자체를 알리는 것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닌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사회가 복잡해지더라도 그 정신만은 그대로 이어져 오기 때문에 경조사 불참 여부를 판가름해주는 이른바 가이드라인으로서 상당한 참고가 될 것이다.

          -행정공제회 '웹진' 4월호(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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