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22 [칼럼니스트] 2008년 4월 2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딴 글 보기 | 거시기 머시기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홈)
서귀포의 향기로운 흙냄새, 나무냄새
우혜전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hazelwoo


서울 북한산을 다니면서 혹시라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마련한 새 등산화를 신고 며칠 전 서귀포 해안선을 따라 들길을 걸었다. 올레코스라고 개발되기 시작한,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길이다. 현지에 사는 사람들이 농사지으러 다니는 길이거나 소나 말이 다니는 그런 곳으로 육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곳이다. 길이 없어 길을 낸 곳도 있다. 자연 속에서 풀과 흙으로 겹겹이 쌓인 최고의 카펫 길을 걸으니 등산화로 무장한 내 발이 쑥 하고 내려간다.

아주 푹신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흙을 밟으며 이렇게 편안하게 느낀 것은 처음이다. 어떤 카페트가 이보다 더 푹신할 수 있을까? 아마 이 길은 현지 청년들이 낫으로 풀을 베고 돌맹이를 골라 올레걷기 하려고 비행기타고 오는 사람들을 위해 낸 새 길 일지도 모르겠다. 풀 벤 자국이 있고 베어진 풀들이 누워있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북한산 등산로와 다르다. 북한산 등산로는 사람의 발길로 반질반질해진 곳이 많고 아스팔트처럼 딱딱하기 까지 하다.

사실 서울의 북한산은 거기까지 닿기도 전에 죄송함을 느낀다. 지하철 어느 역에는 토요일인지 일요일 인지 아침시간에 북한산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리니 피해달라는 광고까지 하고 있다. 버스 안에서는 등산용 지팡이가 다른 승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방송을 들어야 한다.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두 줄 타기를 하라, 왼쪽으로 걸어야 문화시민이라는 둥 정말 내 돈 내고 타면서 이런 저런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에스컬레이터에서는 사람들이 오른쪽에 서고 바쁜 사람들은 왼 쪽으로 걸어 올라간다. 이들은 규칙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런던 지하철에서는 이렇게 해도 아무 말 안하는데 서울은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사람을 마치 범죄자 취급이다. 규칙을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거기에 안 따르면 잘못됐다는 식이다.

서귀포 들을 걸으면 이런 간섭을 듣지 않아도 된다. 머리 나쁜 사람들이 위에 앉아 규칙을 만들어 놓고 바꾸며 이랬다저랬다 하며 일상을 피곤하게 만드는 그런 세상으로부터 자유롭다. 서귀포의 산과 들에서는 풀과 꽃, 나무와 흙에서 나는 향기를 맡기만 하면 된다. 제주도는 육지에서 집안 화분에 키우는 소철을 가로수로 심는 아열대지방같은, 한국 같지 않은 이국적인 섬이기는 하지만 특히 산과 들에서 나는 향기가 값비싼 향수 보다 더 좋다.

한가지 꽃에서 난다기 보다는 풀 나무 흙이 모두 어우러져 나는 향기이다. 길이 구부러지면 달콤한 향기가 나다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면 또 다른 냄새가 난다. 백리향 아니냐 민트향 아니냐 하면서 같이 걷는 사람들끼리 코로 냄새를 들이키며 무식한 대화를 나눈다. 확실한 것은 서울의 산에서는 맡을 수 없는 냄새, 서울의 근교 산에서는 지금 나지 않는 향기이다.

차가 주인이 되어버린 서울, 길을 건널 때도 차 속 운전자의 눈치를 봐야하고 마치 보행자는 운전자가 운전하는데 장애물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곳. 큰 차를 가지지 않으면 호텔에서 사람 대접 못 받고 백화점에 갈 때 곱게 화장을 하고 가지 않으면 손님대접도 못 받는 그런 곳 서울. 그러나 서귀포에 난 올레 길은 차가 다닐 수 가 없는 오솔길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다. 사람이 주인이다. 차가 나를 방해하지 않는 산과 들에서 해안선을 보고 걸으며 푹신한 흙을 밟고 나무의 향을 맡으며 계곡에 다다른다. 유채줄기로 만든 아욱국 비슷한 된장국을 먹고 부드러운 고사리나물, 하얀 살이 입에서 녹는 고등어구이를 반찬으로 하는 생활, 그 하루 동안 나는 아무 부러운 것이 없었다. 너무 행복했다.

-2008.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