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19 [칼럼니스트] 2008년 4월 12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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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와 희사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국악계의 마당발 연정(燕亭) 임윤수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6년 전이다. '별난 사람들' 취재가 계기가 됐고 그 뒤 스스럼없이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는 열여섯 살 때 경주 율방(律房)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가락에 반해 평생을 바람처럼 떠돌던 풍류객으로 지난 2004년 87세를 일기로 풍류무대를 저승으로 옮겼다.

연정 선생은 1981년 평생을 수집해온 국악기와 국악관련 자료 1만여점을 대전시에 쾌척, 시립연정국악원을 설립하는 계기를 마련해 초대 연정국악원장을 지냈다. 당시 기증한 자료 가운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악학궤범'과 국내 유일본인 '졸장만록', 500년이 넘는 거문고 등이 포함돼 있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문화훈장(1995년)을 받은 국악계의 거목이었다.

대기업 문화재단과 대학교에서 거액을 제시하며 국악자료 기증을 제의했지만 거절하고 대전시에 '희사(喜捨)'했다. 유명 사찰을 떠돌며 불교 의식음악인 범패(梵唄)를 지도했던 연정 선생은 '기부(寄附)'가 아니라 '사무량심(四無量心)'에 따른 '희사'임을 강조했다.  
불교에서는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고통의 미혹됨을 없애주는 '네 가지 덕목(四德)'을 자(慈), 비(悲), 희(喜), 사(捨)라고 한다. 그 가운데 '희'와 '사'를 합친 '희사'는 '기쁜 마음으로 준다'는 깊은 뜻이 담겨있다.

최근 부자학연구학회(KAAS)가 '존경받는 부자 데이'란 독특한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라에서 최염 경주 최씨 중앙종친회 명예회장은 부(富)의 사회환원은 '기부가 아니라 희사다'고 주장하면서 '희사는 말 그대로 기쁘게 버리는 정신'이라고 강조한 대목이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일제 때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대 준 그의 할아버지는 광복 후 남은 재산을 털어 지금의 영남대와 계림대를 세웠다. 그 당시 할아버지는 최 명예회장을 불러놓고 "사학재단에 희사하면 너는 한푼도 못 받는다. 네 의견을 묻겠다"고 했다. 최 명예회장은 속으로는 서운했지만 할아버지의 큰 뜻에 동의했다고 한다. 지금은 스스로를 평범한 중산층이라는 그는 "재산은 많지 않아도 조상 대대로 물려온 정신적 재산이 풍족하니 진정한 부자 아니냐"는 넉넉한 마음이 더욱 풍요롭게 느껴진다.

부자학연구학회는 정당한 부의 축적과 부의 적절한 사회환원을 통해 한국에서도 존경받는 부자의 수를 늘리자는 목표로 지난해 9월 결성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존경받을 만한 부자는 전체 부자 가운데 10%가 안 된다는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났듯이 부의 축적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그다지 곱지 못하고 사회환원 또한 미흡한 실정이다.

철강사업으로 돈을 번 카네기는 저서 '부(富)의 복음'에서 '부자의 인생은 부를 얻는 전반부와 부를 분배하는 후반부로 나뉘어야 한다'고 나눔의 철학을 제시했다. 그는 교육과 문화사업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여 존경받는 부자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돈을 버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부의 가치가 빛날 수 있다. 기쁜 마음으로 내 놓는 '희사'는 세상을 기쁘게 하고 사회를 아름답게 한다.

-2008. 4 12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