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12 [칼럼니스트] 2008년 3월 19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딴글보기 | 거시기머시기 | 손님칼럼 | 배달신청 | columnist.org(홈)

섬진강의 봄

이규섭 (서울칼럼니스트모임회원, 시인)
http://columnist.org/kyoos

봄은 종종걸음으로 온다. 봄의 리듬은 봄나물 캐러 나온 아줌마들의 호들갑스러운 웃음처럼 경쾌한 왈츠다. 섬진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봄이 흐르는 강이다. 매화와 산수유, 벚꽃이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는 섬진강의 봄을 따라가면 꽃구름 속에 어질어질 꽃 멀미가 인다.
전북 진안의 데미샘에서 태어난 섬진강은 곡성에서 요천과 합류하여 폭을 넓힌 뒤 중모리가락으로 의연하게 흐른다. 구례 들판을 적시며 애간장을 녹이듯 진양조가락으로 굽이굽이 흘러온 강물은 하동 화개천에서 봄을 희롱하며 유유히 흐르다 광양만에서 600리 여정을 마친다.

남원에서 19번 국도를 갈아타고 밤재 터널을 빠져나오면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피는 구례군 산동마을이다. 잎 보다 먼저 목을 내민 산수유가 마을과 계곡에 노란 물감을 뿌려 놓아 마음에 노란 꽃물이 든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달리는 19번 국도와 861번 지방도는 이른 봄 가장 아름다운 꽃길이다. 섬진강에 발을 담근 백운산 삼박재 기슭의 청매실농원에서는 요즘 매화꽃잔치가 한창이다. 일찍 피어나는 올매화, 늦게 피는 넘매화, 60년 노목도 뒤질세라 솜사탕만한 꽃송이를 뿜어 눈이 부시도록 화사하다.
섬진강 푸른 물과 하얀 모래사장, 녹색의 대나무 숲이 삼색 조화를 이뤄 두루마리 수채화를 펼쳐놓았다. 손등이 거북등이 되도록 매화 밭을 일군 매실농장 안주인은 이맘때가 가장 바쁘다. 매실된장이 익어 가는 2,000개의 장독대사이에서 모델이 되어주기도 한다.

섬진강의 봄은 '영·호남이 어우러지는 화개장터'에서 무르익는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남도대교가 섬진강을 가로질러 편해졌다.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 보아도 길 멀미가 나지 않는다'는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다.
난장이 열리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 벚꽃 길'은 4월 초엔 꽃구름이 하늘을 가린다. 십리 벚꽃 길 끝머리 화개천 한가운데서 솟아나는 화개약수는 '물 속의 물'로 불리는 약수로 길손의 갈증을 적셔준다. 벚꽃 길 맞은편은 우리나라 차시배지로 연초록바다를 이뤘다.

전라도 광양과 경상도 하동을 이어주는 섬진교를 건너면 하동송림. 향긋한 솔 내음에 머리가 맑아진다. 섬진강의 봄은 하동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 뒤뜰에서도 파릇파릇 돋는다. 평사리 넓은 들판과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다. 소설 속의 서희가 별당 문을 밀치고 봄 마중을 나올 것 같다.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는'(김용택 시 '섬진강' 중에서) 섬진강의 봄 풍경은 한 폭의 시요, 한 폭의 그림이다. '물을 보면서 마음을 깨끗이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觀水洗心 觀花美心)'는 장자(莊子)의 심정으로 강물에 허욕을 씻고 꽃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2008. 3. 17.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