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403 [칼럼니스트] 2008년 1월 3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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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음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재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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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관공서나 금융기관, 판매회사 등에 민원이 있거나 물어볼 일이 있으면 전화를 걸게 된다. 과거에는 안내원이 전화를 받아 민원인이나 고객이 요구하는 부서에 연결해주지만 요즘은 자동응답시스템(ARS)이 이런 일을 대신해주고 있다.

사람이 일일이 제공하던 서비스를 전화가 자동적으로 미리 녹음된 내용을 각각의 경우에 맞춰 답변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 바로 ARS안내이다. 이 서비스가 처음 선보였을 때만 폭넓은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초기의 ARS는 전화번호 안내나 좌석예약, 자동통지 등 간단한 서비스에 국한됐었다. 그러나 컴퓨터의 기억장치 대용량화, 고집적화, 고속화와 함께 음성의 디지털화가 가능해지고 음성압축기술이 진보하면서 ARS방식도 크게 발전하고 종류도 다양해졌다.

ARS는 1990년대 초 ‘700서비스’ 프로야구정보안내가 붐을 일으키자 오늘의 운수, 건강상담, 날씨안내 등 여러 분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1990년대 중반부터 ARS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이후 삐삐인사말, 휴대폰 음성녹음 등 개인의 생활에까지 깊숙이 침투하면서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관공서에서 ARS를 도입한 것은 인력과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ARS는 매우 고마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원인의 입장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볼일이 있어 전화를 걸었을 때 녹음된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버튼을 누를 경우 “통화량이 폭주하고 있으니 다음에 전화하라”는 말을 듣기가 일쑤이다.

ARS가 불편한 것은 여러 경로를 거쳐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에는 내가 필요한 곳의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걸면 담당자와 바로 통화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음성안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행여 버튼을 잘 못 누르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금융기관이나 통신회사 같은 곳은 그래도 좀 낫다. 기다려야 할 시간까지 가르쳐 주는가 하면, 고객을 위해 한 두 번 거치면 바로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공서의 경우는 민원인을 위한 배려가 너무 부족한 실정이다. 모든 것을 ARS에 맡겨 놓고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ARS가 관공서로 봐서는 인력감축 등의 효과를 거둘지 모르겠지만, 국민들이 부담하는 경제적·시간적 낭비를 감안할 때 국가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 게다가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서 연결이 되지 않으면 짜증까지 나기 마련이니 국민의 건강에도 좋을 리는 없다고 하겠다.  

신문의 독자투고란에는 ARS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글이 자주 실린다. 투고자의 글을 읽다보면 우리들이 겪었던 내용을 그대로 전하고 있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야말로 “ARS를 통해 담당자와 연결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는 어느 독자의 푸념이 가슴에 와 닿는다.

ARS와 관련해 신년초 전해진 부산에서의 소식은 상쾌하기 짝이 없다. 부산고법과 부산지법, 부산지법 가정지원의 전화안내방식이 지난 7일부터 기존의 ARS에서 사람이 직접 수신하는 교환원 안내로 전환됐는데, 민원인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 각급 법원의 ARS안내는 2001년 서구 부민동에서 연제구 거제동으로 청사를 이전하면서 도입한 것인데, 이를 7년 만에 폐지한 까닭은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ARS안내가 민원인들에게 편의를 주기는커녕 민원대상 1호로 꼽힐 정도로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ARS안내는 민원인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관청의 편의만 생각해서 도입되다보니 통화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단계도 많아 민원인들을 분통터지게 하는 주범이었던 셈이다. 이는 결국 법원을 불신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부산 각급 법원의 ARS는 관련부서에 전화를 연결하기 위해서 적게는 7~8단계, 많게는 16단계까지 거치도록 돼 있었다. 이 때문에 보통 3분이 넘게 걸리는데다 중간에 버튼이라도 잘못 누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므로 민원인들이 겪는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산법원의 하루 평균 ARS 접속건수는 1천300통에 달하지만 이 가운데 내선번호를 모르거나 담당과를 몰라 헤매다 상담 교환원에게 연결되는 건수는 겨우 150통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민원인들로부터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법원이 참으로 시민을 위해 잘 한 일이다. 모든 공공기관들이 ARS안내를 폐지했으면 좋겠다.” ARS안내 폐지에 대해 한 부산시민이 한 말이다. 부산고법 관계자도 “ARS제도를 폐지하고 교환원 방식으로 전환하니 마치 교통체증으로 막혔던 도로가 뻥 뚫린 듯 시원하다”고 말했다.

1995년 미국에서의 일이다. 보스턴시는 ARS 때문에 불편을 겪는 시민들로부터 “기계에 녹음된 소리가 아닌, 인간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건의를 받았다. 그러자 시당국은 시청 안에 설치했던 모든 ARS를 제거했다. 시민에게 봉사하는 공공기관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현재 부산을 제외한 각급 법원은 물론 한국철도공사, 국민연금관리공단, 병무청 등 많은 공공기관들이 관련 업무를 ARS로 안내하고 있다. 역시 단계가 복잡하고 까다로워 민원인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 부산시민의 바람대로 ARS안내 폐지가 이참에 다른 공공기관으로 확산되길 기대해본다.

- 2008.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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