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88 [칼럼니스트] 2007년 10월 6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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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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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 중.고교 시절 소풍 가본 적 있어?" 얼마 전 어느 술자리에서 언론사 현직사장인 한 친구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전에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 서로 살아온 과정을 대강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는 얘기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저으기 당황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얘기를 꺼내려고 실마리 찾는 것이 분명해 "중.고교 시절은 물론이고 초등학교 때도 못간 적이 많다" 했더니 벌써 짐작했다는 듯이 씩 웃으며 자기도 그랬다는 것이다.

소풍을 제대로 못 갈 형편이니 수학여행은 꿈도 못 꿨다. 그는 대학까지 졸업앨범도 사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은 앨범이 없던 학교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 하여튼 지지리도 가난했다.

그래도 서울의 명문 중에 명문 중.고교를 나온 그가 지방 출신인 나와 비슷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 학교 출신들 중에도 어려움을 겪은 이들이 많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나았으리라고 늘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여튼 소풍을 빌미로 시작된 그의 가난 행각을 한참 들었다.

나는 소풍이라면 당연히 못 가는 것이었고 어쩌다 한번 가면 후유증을 심하게 앓아야 했다. 다름 아닌 사진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앞 사진관 아저씨가 전속으로 따라와 학급단위로 두어 장 찍고, 넉넉한 집 애들은 이어 개인별 사진을 찍었다. 나 같은 애들은 개인별 사진은 언감생심이었다.

사진이 나오면 돈을 내고 찾아야 하는데 그게 문제였다. 돈이 없어 못 찾는다고 하면 선생님이나 반장이 들들 볶고, 집에서는 왜 사진을 찍어 가지고 식구들 속을 긁느냐고 잡도리를 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중.고교 시절에는 사진기를 가져 온 친구들에게 끌려 몇 장 찍지만 역시 그놈의 사진 값이 말썽이었다. 초등학교 때와 달라 안 사면 그만이지만 대신 친구의 인화 값만 날리게 해 미안하고, 어쩌다 그냥 가지라면 받아도 속은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10여년전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 댁을 찾아갔을 때였다. 선생님은 정년퇴직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에 살고 계셨다. 초등학교 졸업 약 40년만에 계신 곳을 알아내 이미 몇 번 뵌 터라 처음 상면 때의 감격은 상당히 누그러졌다. 그래도 사제간이라기보다는 아버지와 아들 같은 사이라 고향집에 간 것처럼 언제나 마음이 푸근했다.

그날 어쩌다가 소풍 얘기가 나왔다. 아, TV에서 수학여행과 소풍을 다룬 프로가 나온 것이 계기였다. 선생님은 지금이야 부모들을 따라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여행을 많이 하고. 먹을 것도 풍족하기 때문에 소풍과 수학여행의 뜻이 많이 퇴색했지만, 예전에는 살림이 어렵고 졸업이후 사는 세상도 좁았으므로 그게 일생에 많은 의미를 주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의미보다 소풍에 얽힌 상처가 상당 기간 있었다고 말씀드리니 아무 말도 않으시고 방으로 들어가셨다. 한참 뒤에 낡은 앨범을 가지고 나오시더니 5학년 봄 소풍 사진 중에서 학급 단체사진 한 장을 내미셨다. "이것 니 가져라"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말도 잊어버렸다. 선생님도 아무 말 하시지 않고 창 너머 먼 산만 보시더니 수화기를 들었다.

"거기 XX장어집이요?  좀 있다 갈 테니 두 사람 예약 좀 합시다. 서울서 우리 아그가 와서 그라요. 아, 차로 데리러 올 필요는 없고 돌아올 때나 태워주시오." 이어 사모님한테 말씀하셨다. "오늘 저녁은 애기하고 나가서 하고 올 테니 그리 아소. 오랜만에 둘이 소풍이나 갔다 올라네" '아따 잘 생각허셨소. 그나저나 술은 쬐금만 마시쇼이"

집을 나서니 가을이 상당히 깊어 김장용 무, 배추가 제법 모양을 내기 시작했고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판은 파장 분위기였다. 대신 논두렁 밭두렁에 핀 억새꽃이 흐드러져 석양을 재촉했다. 간이역이 있는 철길을 지나서 걸었다. 아무리 간이역이라 해도 흉내나마 역 건물은 있기 마련인데 이 역은 아무 것도 없고 기차가 서면 그 동안만 정거장이 되는 곳이었다.

장어집은 들판 저쪽 편에 있으므로 서산에 지는 해를 마주 하며 한참 걸었다. 초등학교 당시 봄은 소풍이고 가을은 운동회였으므로 엄밀히 말해 가을 소풍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대수랴. 사제간의 소풍이면 됐지 계절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우리는 해 저무는 늦가을 속을 걸었다. 들판에는 다른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70대 스승과 50대 제자이지만 세월이 할퀸 자국은 너무 험해서 사제간보다는 외람되지만 친구처럼 보였고, 그나마 제자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형국이었다. "누가 보면 아부지보다 제가 더 늙어 보인다고 하겠네요." "아가, 앞에서 겉만 보면 그랄 수도 있단다. 그러나 나이는 뒤에서 더 잘 보이는 법이란다. 아무리 늙은 티를 안 내려고 해도 뒤에서 걸음걸이를  보면 나타나는 법이다. 잘 보면 알 것이다"  평소 과묵하신 분이라 그 외는 별 말 없이 우리는 30분쯤 걸어 장어집에 도착했다.

사범학교를 어떻게 졸업하셨는지 선생님 음악실력은 '아니올시다'였다. 담임선생이 전과목을 다 가르치던 때였는데도 음악시간은 저학년의 여선생님에게 부탁하실 정도였다. 술을 웬만큼 마셔도 노래 부르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시는 것이 아닌가. 아시는 노래도 그 정도인 것 같았다. '목포의 눈물'하고... 만취가 돼 집에 들어설 때도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하시며 계속 흥얼거리셨다.

"워메, 인생은 나그네길 나온 것 봉께 무지하게 마셨는 갑소잉." 하며 사모님이 놀라셨다. "우리 애기하고 오랜만에 홈빡 마셔부렀네. 그것이 인생 아니드랑가"

사모님과 나의 부축을 받고 잠자리에 드신 후에도 선생님은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를 계속 잠꼬대처럼 하셨다. 나도 잠 속으로 어렴풋이 빠져 들어가는데 마루에서 사모님이 혼잣말을 하셨다. "소풍 한번 진하게 했는가비네. 소풍은 학교에서 했던 것잉께 그렇다 치고, 술은 가르치는 책도 없는디 사제간에 술 공부는 언제 저렇게 했을까. 둘이 징하게도 많이 마셨구만이"

-바른 조달 가을호(2007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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