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57 [칼럼니스트] 2007년 4월 1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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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음, 그때 그 열정
박연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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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 맞은 편 한 블록은 거의가 먹자골목이다. 먹자골목이란 대개 회사 밀집지역이나 유흥가, 번화가에 인접해 있기 마련인데 이곳은 좀 다르다. 큰 업체가 별로 없는 평범한 주택가 부근에 있으며 유동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다. 주민들이 주 소비층일 수밖에 없다.

그런 만큼 주민들과 먹자골목이 심리적으로 비교적 가깝다. 그래서 대부분 가게들의 기복과 성패 과정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시작하더니 갈수록 입 소문을 타고 번성하는 집,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어느 날 소리 없이 사라진 가게, 남편 또는 마누라가 엉뚱한 일을 벌여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한 업소 등 가지각색이다. 성공과 실패가 그처럼 무상한 먹자골목은 영락없는 이 세상 축소판으로 거기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 가게 수들만큼이나 다양한  원인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을 크게 묶을 수 있는 한가지 큰 흐름은 다름 아닌 초심 유지 여부다. 개업할 때 가졌던 각오와 뜨거운 열정이 얼마나 일관성 있게 유지되느냐에 따라 성패가 판가름난 것이다.

7, 8년 전 일이지만 생각이 날 때마다 마치 내 일처럼 지금도 가슴 아픈 집이 하나 있었다. 해물음식점이었는데 주인은 40대 후반이었다. 큰 언론사 업무국에서 경리를 보았던 그는 평생을 월급쟁이로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걸 하기로 했다. 부인의 격려 또한 큰 힘이 되었다. 단골로 다니던 음식점에 부탁, 부부가 거기에서 자그마치 1년 동안 주방 일을 배웠다. 그것도 상당액의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그러한 열성이 통했는지 가게는 문을 열자마자 손님이 몰려들었다. 그 바닥 베테랑들까지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도 친구 소개로 그 집을 자주 가게 되었는데 내 식성이나 취향보다는 그의 정열과 각오에 마음이 이끌렸기 때문이다.
 
2년쯤 된 어느 날 해질 무렵 갔더니 그 친구가 없었다. 종업원에게 물으니 물건 하러 갔다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비우는 일이 자주 생겼다.

고객의 느낌은 고감도 센서 못지 않게 민감하다. 특히 여성고객들은 남성들보다 수십 배 예민하다. 벌써 그 단계에서 '이 집 끝났네'라고 진단했다. 그렇게 성실한 친구가 변할 리 없으니 속단하지 말라 했더니 두고 보라는 것이었다. 뭔가 간단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도 여자들은 종업원들 태도 변화와 분위기 침체를 잘도 꼬집어 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가게의 온기가 많이 식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신 부인이 전보다 더 열심히 움직였으나 대세는 이미 기우는 중이었다.

문닫기 직전 부인이 털어놓았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남편이 어느 날 너무 힘들어  하며 월급쟁이 그만 둔 것을 후회하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러더니 일자리를 찾겠다고 나섰다. 이제 가게는 궤도에 올랐으니 부인이 전부 맡고 자기는 퇴근 후에 돕는 방식으로 운영하자면서.

결과는 참담했다. 새 직장은 그의 생각처럼 쉽게 생기지도 않았고, 가게 역시 궤도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착시 현상에 불과했다. 마음만 붕 떠버렸다. 남은 것은 깊은 상처와 피로, 씁쓸한 패배뿐이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개업했을 때의 마음을 끝내 유지하지 못하고, 그 정열 역시 되살리기 힘들 정도로 탄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가까운 이들 가운데서 사업을 시작했다가 중도에서 접은 사람 몇 명쯤은 너나없이 보았을 것이다.  뜻밖의 재앙이나 불운, 경험부족 등으로 실패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업 시작할 때의 마음과 정열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각오에 따른 긴장의 완급 조절에 실패했거나, 이제는 궤도에 올랐다고 안심하다가 중도하차를 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안주하다 주저앉은 후자의 경우가 더 많다.

개개인의 삶도 그와 마찬가지이어서 초심과 열정을 일관되게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쉬운 예로 입시공부 시절 이를 악물고 펴들었던 참고서를 끝까지 파고 든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해마다 정초에 결심한 일들을 이룬 사람도 역시 드물다.

끝까지 관철하면 성공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것 또한 우리네 세상살이다. 사업이나 인생에서 성공한 이들은 이렇게 어려운 일이지만 해낸 것이다.

그들이 그렇지 않는 사람들과 천성적으로 다른 것은 없다. 단 한 가지, 처음 먹었던 마음과 열정을 일관되게 유지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못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주역 기제괘에 '天下之事 不進則退 無一定之理(천하지사 부진즉퇴 무일정지리)'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일이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물러난다. 결코 일정한 상태(현상유지)로 있는 일은 없다'라는 뜻이다. 소동파와 청나라 말기 좌종당도 공부란 배를 타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물살에 밀려 후퇴한다고 했다.

이들은 공부로 한정했지만 주역의 지적처럼 세상 모든 일이 노력하지 않으면 후퇴한다. 현상유지란 사실상 없다. 보기에는 가만히 있는 듯한 오리가 물밑에서는 얼마나 열심히 발을 움직이고 있는가.

초심과 그때 열정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이렇게 힘든다. 그러나 성공에 이르는 길은 이 길밖에 없으니 어찌하랴. 힘들고 어렵더라도 마음을 가다듬고 꾸준히 가는 수밖에 없다.

  삼성 홈플러스 '통' 3월호(2007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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