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50 [칼럼니스트] 2007년 3월 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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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수 파란’ 새싹들의 이야기 - 봄을 기다리며
김소희 (수필가, 동물 칼럼니스트)
http://columnist.org/animalpark


우리는 뿌리내릴 장소와 햇빛과 물만 있으면 쑥쑥 잘도 자란다. 광합성을 통해 얻어낸 에너지를 수많은 동물과 인간에게 기꺼이 내어준다(참 욕심도 없지). ‘밥심’을 불어 넣어주는 쌀, 다크 써클이 턱까지 내려와도 밤샘 작업을 무사히 마치게 해 주는 커피, 병을 치료하고 힘이 불끈 솟게 하는 각종 약초. 그뿐인가? 지금 여러분이 펼쳐들고 있을 이 책도, 입고 있는 옷(문익점 아저씨께 감사드리며)도, 새집증후군에 시달리게 만드는 콘크리트 밀림이 생기기 이전에는 여러분이 사는 집 역시 우리 몸이었다. 아! 사람들이 너무도 사랑하는 돈뭉치 역시 우리 몸이구나. 이 얼마나 대견하고 위대한 존재인가? 에헴!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사람들은 식물을 동물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우리 삶에 별관심이 없는 것 같다. 아직 봄이 되려면 시간도 좀 남았고 딱히 바쁜 것도 아니니 이야기나 좀 해볼까?

먼저, 우리 식물은 언제 이 땅에 태어났을까? 지구의 나이는 45억살. 이해를 돕기 위해 학자들이 지구의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변환시켜 보았더니, 지구에 최초의 식물(해양식물)이 나타난 것은 저녁 8시 30분경이라 한다. 그리고 밤 9시 55분 육지식물들이 등장했다. 육상 동물은 밤 10시, 그리고 인간이 나타난 것은 자정을 1분 17초 남겨둔 11시 58분 43초! 자, 이제 우리 식물이 얼마나 유구한 역사를 지녔는지 이해가 가는지? 우리는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긴 세월동안 지구의 역사를 지켜본 장본인이다. 우리를 빼놓고는 지구의 삶을 논할 수 없다.

너도 나도 다 있는 그 흔한 팔 다리도 눈, 코, 잎도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이 오랜 세월을 버텨내며 유전자를 지속시켜 올 수 있었던 걸까? 동물이 암수가 만나 새끼를 낳아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듯, 우리들 역시 암수가 만나 씨앗을 맺는다. 수천만종에 이르는 식물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법을 개발했는데, 아름다운 꽃(동물로 치면 생식기에 해당하는)을 피운 뒤 작은 새나 벌 같은 벌레들을 유혹해 꽃가루를 옮기게 하기도 하고, 꽃이 없는 식물은 포자를 퍼뜨려 번식하며, 감자처럼 씨앗이 아닌 땅속줄기로 번식하는 것도 있다.

꽃의 암술에 있는 밑씨와 수술의 꽃가루가 만나 탄생한 씨앗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씨앗 안에는 어린 새싹과 줄기, 뿌리가 숨어있고 어린 식물이 될 때까지 필요한 영양분도 함께 들어 있다. 병아리가 될 배자(노른자에 붙어있는 작고 새하얀 덩어리)와 병아리로 자라기까지 필요한 영양분이 되어줄 흰자, 노른자로 구성되어 있는 달걀과 마찬가지 이치다. 여린 새싹을 보호하기 위해 딱딱한 껍질로 둘러싸여 있는 것도 같다.

식물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어서 스스로, 또는 다른 존재의 도움을 받아 씨앗을 퍼뜨린다. 바람을 타거나, 물과 함께 흐르기도 하고, 개미나 벌, 그 밖에 동물들의 몸에 무임승차해서 여기저기 떠돌기도 하다가 적당한 자리를 찾는다. 나 같은 경우는 다람쥐 밥이 될 뻔하다가 용케 미끄러져 나와 싹 틔울 준비를 하고 있지만, 가끔, 동물에게 먹힌 뒤 위장, 소장, 대장 ‘신체 대탐험’을 마친 뒤 똥과 함께 밖으로 나와 싹을 틔우는 녀석들도 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도 하지만, 씨앗들도 저마다 사는 방법이 다르니 존중할 수밖에.

씨앗에서 새싹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 물, 온도, 공기(산소)만 있으면 그만이다. 하긴 그것도 적당해야지. 누구나 학창시절 한두 번쯤은 해 봤을 ‘강낭콩 키우기’ 숙제 덕분에 얼마나 많은 콩들이 죽어나갔는지 모른다. 어떤 아이는 아주 콩을 익사라도 시키려는 듯 샬레 한 가득 물을 주기도 했고, 너무 춥거나 너무 뜨거운 곳에 놓아 동사 혹은 아예 콩찜이 되어버린 녀석도 있었다. 무사히 자라면 허물이 벗겨지듯이 껍질이 벗겨지고 그 사이로 작은 새싹이 고개를 내민다. 새싹들은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광합성 작용을 통해 에너지를 얻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하지만, 씨앗 자체가 건강하지 못하거나, 환경이 적합하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녀석’들이 태어나기도 한다.

한편, 우리는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붙박이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래서 식물은 혹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생존전략을 개발했다. 우선 식물은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가을부터 준비태세에 들어간다. 몸 안의 수분과 영양분이 잎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제 살점을 도려내는 것이다(이쯤 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신나라 단풍놀이를 떠나더라). 나무가 그렇게 헐벗는 것은 겨울잠 채비를 갖추는 셈이다.

씨앗 역시 휴면이 가능하다. 껍질에 싸인 채 활동을 멈추고 있는 것을 씨앗의 휴면이라고 한다. 죽은 듯 보이지만, 언제든 적당한 물기가 주어지고 온도, 공기, 빛 등 그 밖의 조건이 갖추어지면 싹이 트는 놀라운 능력이다. 씨앗 안에는 새싹이 돋을 때까지 필요한 양분이 들어있다. 나도 그 영양분을 먹으며 봄을 기다리고 있다. 땅 속의 씨앗이 겨울에 싹트지 않고 봄이 되어서야 싹을 틔우는 것도, 성공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환경 조건이 봄에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다가오고 있다. 몇 달 간 어두운 땅 속에서 움츠린 채 씨앗 속 영양분으로 연명하고 있던 새싹 친구들 모두에게 얼마나 기쁜 소식인지. 새싹들이 얼마나 간절히 봄을 기다리는지 알고 싶다면, 언 땅이 녹을 무렵 인적 드문 숲 속을 찾아가 보시라. 도시가 내뿜는 소음이 증발해 버릴 만큼 고요한 숲 속에 다다르면, 우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투둑, 툭, 툭, 투두둑.’ 바로 작고 여린 새싹들이 얼어붙은 흙더미를 뚫고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내미는 소리다. 이 땅의 모든 꽃과 풀과 나무들이 거쳐 간 산고의 소리.

-웅진식품 사보 2월호(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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