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36 [칼럼니스트] 2007년 1월 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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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꼬라지 하고는
김소희
http://www.animalpark.pe.kr
('아주 특별한 동물별 이야기' 저자)


삼겹살과 베이컨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허기진 속을 채워주고, 돈피란 이름으로 외양을 빛내주며, 고사가 있을 때면 웃는 얼굴로 성공을 빌어주고, 꿈자리에 등장에 대박기원을 점지해 주는 우리들. 스스로 생각해도 우리 돼지는 인간에게 뭐 하나 버릴 것 없는 유용한 동물이 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사람들은 이 몇 가지를 제외하곤 우리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일에는 굼벵이요, 먹는 데는 돼지다’ 처럼 우리 이름이 거론되는 속담 및 관용어구도 셀 수 없이 많지만, 어째 뒤통수가 따가운 말들 투성이다. 2007년 정해년(丁亥年) 돼지해를 맞아 하소연 좀 해볼까 한다.

우선, 돼지는 개, 그리고 양(그리고 염소)에 이어 세 번째로 가축화된 동물로, 학자들은 그 시기를 약 9천만년 전으로 추정한다. 개의 조상이 야생의 늑대이듯, 우리의 조상은 야생 멧돼지다. 우리도 처음부터 이렇게 허여멀건하게 부어있었던 것은 아니란 말씀이다. 오랜 시간 인간의 필요에 따라 길들여지는 동안, 늠름한 송곳니와 떡 벌어진 어깨, 거친 털,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우릴 볼 때마다 더럽고 냄새난다며 콧구멍을 틀어막는다. 돼지가 더럽다니?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렇게 비좁은 곳에 갇혀 여생을 살다 보니(땅값, 전기값도 절약되고, 덜 움직여야 고기도 연해지고, 그러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으니 사람들 입장에서는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겠지만) 마지못해 이런 ‘꼬라지’로 지내게 된 것 일뿐, 우리 돼지도 넓은 공간에서 살면 화장실, 노는 곳, 잠자는 곳, 밥 먹는 곳을 가려서 사용하는 누구보다도 깨끗한 동물이다. 아참, 야생의 돼지들은 종종 진창에서 뒹굴기도 하는데, 이것은 돼지가 체온을 조절하는 땀샘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탓에 열기를 식히기 위해 하는 행동일 뿐이지, 돼지가 원래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철없던 시절, 사람들이 서로에게 ‘돼지 같은 놈’이라 말하는 것을 듣고 멋도 모르고 뿌듯해하곤 했었다. 욕심많고 미련한 사람을 일컫는 ‘세상에서 제일 심한 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참나, 우릴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런 소릴 하는지!) 돼지공장이 생기기 전, 옛 사람들은 어미 돼지를 새끼 돼지들과 같은 우리에 키우지 않았다. 어미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양보하는 바람에 살이 찌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 야생의 멧돼지도 먹을 것을 두고 미련스레 다투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서열에 따라 먹이를 먹을 뿐이다.

많은 학자들이 개보다 돼지가 지능이 더 높다고 하지 않던가? 어릴 때부터 길들이면 개 못지않은 학습 능력과 주인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을 보인다. 숨겨진 물건을 찾거나, 빗장을 열어 문을 여는 법도 곧잘 익힌다. 또 주인과 장난치며 뛰놀기를 좋아하기도 하는 사교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영국의 한 대학 연구팀이 훈련 끝에 ‘햄릿’이란 돼지에게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햄릿은 특수 제작된 손잡이를 이용, 컴퓨터 모니터 상에 나타나는 푸른 상자 안으로 커서(cursor;컴퓨터의 표시 화면에, 입력 위치를 나타내는 특수 기호)를 옮겨 넣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개의 경우는 1년간의 교육 끝에도 결국 이 훈련에 실패했다.

내친 김에 자랑하나 더 할까? 개코보다 돼지코가 더 민감하다는 사실 아는지? 야생 멧돼지는 몇 리 밖에 있는 포수의 화약 냄새를 맡고 도망할 정도이며, 돼지들은 냄새만으로 주인과 낯선 사람을 구분한다.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로 꼽히는, 그래서 땅 속의 보물로 통하는 송로버섯을 찾는 데도 개가 아닌 돼지가 이용된다. 송로버섯은 소나무 숲의 땅 속 아래서 자라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 일을 다름 아닌 우리 돼지가 한다. 불과 얼마 전, 한 돼지가 찾아낸 1.5kg짜리 송로버섯이 1억 5천만원에 팔렸다는 해외토픽도 있었다. 그 밖에, 고대이집트 및 유럽에는 사냥감을 물어오는 일, 밭을 가는 일, 씨앗을 땅에 뿌리는 일, 짐수레를 끄는 일 등에 돼지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돼지는 예로부터 길한 짐승으로 다산과 재물의 상징이자, 복의 근원, 집안의 수호신으로 여겨져왔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돼지가 인도하는 곳으로 수도를 옮겼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신성한 동물이었다. (에헴!) 돼지는 일년에 두 번씩, 약 4달의 임신기간을 거쳐 한 번에 10마리 정도의 새끼를 낳는데, 덕분에 5년이면 새끼 백 마리를 낳을 수 있다. 이처럼 순풍순풍 자손을 불리는 돼지의 기운이 전해져 재물을 불릴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자리 잡으면서 돼지는 재물과 복을 상징하는 동물이 되었다. 게다가 돼지의 한자말 ‘돈(豚)’이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돈(money)’과 소리가 같으니 두 말할 필요가 없지 싶다.

몇 해 전, 어미를 덫에 잃고 고아가 된 새끼 멧돼지들이 자신들을 돌봐 준 주인에게 은혜를 갚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적 있다. 아사 직전에 놓인 새끼들을 데려다 돌봐 준 주인은 덩치가 커져가는 멧돼지 삼형제를 여러 차례 숲으로 돌려보냈지만, 그 때마다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멧돼지 삼형제는 소가 끌던 쟁기를 몸에 맨 채 밭을 갈고,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를 끌며 주인의 농사를 도우며 지냈다. 때때로 동네 아이들을 썰매에 태워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온 마을에 웃음꽃이 퍼져나갔다. ‘은혜갚은 돼지’라는 제목이 꼬옥 들어맞는 훈훈한 뉴스였다. 경제동물이란 이름 아래 오직 ‘인간을 위한 고기’로 태어나 살고 죽는 돼지. 서식처를 잃고 텃밭을 망치는 범죄자로 쫓기며 살아가는 멧돼지. 그러나 우리도 사랑받으면, 그만큼 사랑을 돌려줄 줄 아는 제법 근사한 동물임을 기억해 주시길...

독자 여러분.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소원하는 일 모두 성취하는 행복한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꿀꿀꿀

-[웅진사보 1월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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