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24 [칼럼니스트] 2006년 11월 8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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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들, 마침내 이름표를 달다

이재일 (정보통신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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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부산-서울 친구들의 문경새재 합동등반에서 나는 그리운 친구들을 만나는 기쁨을 맛본 것 외에 또 한 가지 의미 있는 결과를 얻었다. 젊은 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같은 쉰세대에게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말해보려 한다.

행사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서울친구들이 이름표를 달자고 제의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해온 탓에 부산친구들의 이름을 까먹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산친구들은 당연히 그러자고 했다.

부부동반 행사 때 이름표를 만들면 지금까지는 남편의 이름만 써왔던 게 우리 동기생들의 관행이었다. 아내는 남편의 이름이 적힌 것을 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서울친구들이 “마누라의 이름표에도 본인의 이름을 쓰고, 그 밑에 괄호를 열고 조그맣게 남편의 이름을 쓰자”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부산사나이들-. 너무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처음부터 “웃기는 소리”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친구도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졸업 20주년, 30주년, 40주년 등 홈카밍 행사를 세 번이나 하면서도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남편이름만 쓰면 됐지, 무슨 마누라 이름까지 쓰느냐?” “자기 이름을 밝히려는 여자가 어디 있겠나?” “그냥 ‘000의 부인’이라고 쓰도 충분할 텐데 굳이 여자이름을…” “부산놈이 서울 가더니 이제는 완전히 서울놈이 돼버렸군. 쯧쯧쯧.” 온갖 코멘트가 쏟아졌다.

그러나 서울친구들은 답답하다는 듯 부산친구들을 나무랐다. “마누라한테 혼나려고 그러느냐? 정말 겁없는 친구들이군.” “여자도 엄연히 하나의 인격체인데 아직도 남편이름만 쓰겠다는 촌놈들!” “마누라 무시했다가 나중에 무슨 대접을 받으려고?” 그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서울친구들의 논리가 그럴 듯해 보이지 않은가. 부산친구들은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이 문제를 논의했다. 결론은 “서울놈들 생각이 맞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는 마당에 괜히 이름문제로 수세에 몰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부산친구들은 서울친구들의 주장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는 가을기운 가득한 문경새재에서 우리들은 만났다. 물론 남편은 남편이름을, 아내는 아내이름을 표기했다. 부산에서 출발하면서 이름표를 나누어주는 순간, 몇몇 부인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보고 멋쩍어했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내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달고 보니 이제야 나 자신을 찾은 것 같다.” 행사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한 친구의 아내가 이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사모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옳다”며 맞장구를 쳤다. “역시 서울사람들이 다르다”는 소리도 덧붙였다. 서울친구들의 제의로 자신의 진짜 이름표를 달게 됐음을 알고 이렇게 칭찬을 하는 것이었다.

문경새재를 갔다 온 뒤, 부산친구들의 반응은 이전과 전혀 딴판이었다. 아내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달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렇게 좋아하더라는 것이었다. 서울친구들의 아내들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어엿이 달고 있는데 자신들은 남편의 이름만 적힌 것을 달았더라면 어떻게 됐겠느냐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문경새재에서 자기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단 아내를 보는 순간, 상당한 무게감(?)을 느꼈다. 그리고 매우 당당해 보였다. 그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날 이후 아내의 존재가 정말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됐음은 나만의 일일까. 다른 친구들은 어떤지 궁금해진다.

-200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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