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20 [칼럼니스트] 2006년 10월 11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딴 글 보기 | 의견함 | 거시기 머시기 | 배달신청/해지 | columnist.org(홈)
책 읽는 사람은 향기가 남다르다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ynhp


친구들 가운데 교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꽤 있다. 모두들 제2세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어 보기만 해도 미덥고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그렇지만 옥에도 티가 있다던가. 그 중에는 참으로 아쉽다는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는 친구가 없지 않다.

언젠가 오랜만에 만난 한 교육계 친구와 회포를 풀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 우등상장의 상투적 표현대로 '학업성적이 타의 모범이 되고 품행이 방정한' 친구였다. 그 자질을 바탕으로 교단에서도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소식을 풍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런 친구를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어느 정도이겠는가. 다른 친구 서넛과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학교시절 기억, 군대와 직장의 체험, 가정을 꾸려가며 만나는 여러 가지 일들로 화제가 넘나들었다.
 
기대했던 대로 그는 직장과 가정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어서 여러 모로 남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한참 얘기를 나누다 보니 뭔지 모르게 분위기가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술집의 탁한 공기와 소란스러움 때문인가 했으나 그것만도 아니었다.

그 원인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학창시절의 교과서적 사고방식과 안정된 직장, 만족스러운 일상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그는 어느 면에서 흐르지 않는 물이었다. 자기 테두리 속에 스스로 갇힌 그는 더 넓은 세계를 거부하며 사는 우물안 개구리였고, 흐르기를 마다하고 그대로 고여버린 물이었다. 바로 그 냄새가 우리들을 피곤하게 만든 것이다.

"집안에 들어앉은 똑똑이보다 나도는 머저리가 낫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도 자기 생각에만 갇혀 있으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듣는 머저리보다 식견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즉 견문이 좁아진 것이다.

예로부터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여행이나 일정기간 집을 떠나서 살아보도록 하는 프로그램들이 많았는데 바로 견문을 넓히기 위한 직접적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는 비용, 이동수단, 건강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상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책을 통해 견문을 확대하는 방법은 간접적이지만 그보다 훨씬 범위가 넓으면서도 경제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이란 무엇인가. 많은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평범한 관점에서 말한다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인간의 삶이 지니는 원리 및 운동법칙, 그들 상호간의 작용과 영향, 변화의 양상 등에 대한 체험의 축적이다.

책은 바로 이런 것들을 전해주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늘 책을 가까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을 읽어서 식견과 체험을 확대하지 않으면 그건 흐름이 중단된 고인 물이요,  기능이 마비된 나침반일 수밖에 없다.

공자가 어느 날 자기 아들한테 시를 읽었느냐고 물었다. 시는 '시경'을 지칭한 것이지만   그 외 여러 책까지 포함한 의미였다. 이어 읽지 않는다면 담벼락에 가로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출구도 전혀 없는 상황과 같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내일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변화하는 현대에서는 책을 열심히 읽지 않으면 공자가 살았던 당시보다 더욱 암담한 결과에 이르고 말 것이다. 지금 너나없이 정보화시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정보는 견문과 체험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견문과 체험이 좁으면 집안에만 들어앉아 천하를 아는 체 하는 '똑똑이'처럼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 고루한 사람이 되기 쉽다. 이는 자기만의 손해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주변 사람들을 고달프게 하고, 사회에도 달갑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각 분야에서 그런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으며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자기만 잘 났다고 설치고 나대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거나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면 그렇게 옹색한 사람이 되지 않는다. 가끔 독서를 많이 하면서도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책을 올바로 읽지 않아서 생긴 오만이지 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가져야 할 덕목 중의 하나로 겸손을 들 수 있다. 넓은 견문은 이를 기르는 필수요소다. 책과 체험을 통해서 자기보다 훨씬 우수한 사람들의 생각과 뛰어난 업적을 접하다 보면 오만해지고 싶어도 오만해질 수 없다. 겸손은 여기서 자생하는 것이다. 겸손을 높은 인기와 많은 지지를 받기 위해 필요한 한 기술쯤으로만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인식을 가지고서는 절대 겸손해질 수 없다. 겸손은 처세술 트레이닝 센터 같은 곳에서 일정기간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노력해야 할 덕목이다.

독서가 생활화되어 그 양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그 깊이와 넓이에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상대방을 감싸주는 안온함과 남다른 향기를 풍기는 그 은근한 기품에 취하기 마련이다. 어느 특정기간 배우고 읽은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즉 흐름을 중단하고 고여있는 물처럼 답답한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디지털시대로 접어들면서 견문을 넓혀주고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가 다양해지고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각종 매체가 종이책이 감당하지 못했던 부분을 폭넓게 커버하고 있다. 따라서 견문을 넓히기 위해 독서를 한다는 것은 종이책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디지털 매체에도 익숙해지고,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종이 매체와 다른 매체가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의 지위에 많은 변화가 오고 있지만 아직도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간편한 접근성과 휴대의 편이성 등에서 특히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끔찍한 이가 책을 딱 한 권만 읽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읽은 것만 고집하여 자신은 물론 남을 불편하게 하며 고여서 썩은 물처럼 악취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를 어떤 테두리 안에 가두지 않으려면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책 읽는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뜨거워 머릿속이 열탕이었던 여름 뒤의 가을은 책과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에 매우 적절한 시점이다. 주변이 모두 잠든 깊은 밤이나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같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바른 조달' 가을호 (2006 10)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