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302 [칼럼니스트] 2006년 7월 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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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아버지들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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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극단 '현대예술극장'의 최불암 대표가 아서 밀러 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무대에 올리겠다고 했을 때 나는 기대보다 우려가 앞섰다. 연극이란 그때나 지금이나 수익은커녕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기 일쑤여서 우선 걱정이 됐고 소극장도 아닌 호암아트홀에서 그것도 약 3주간이나 공연할 계획이라고 해서 더욱 그랬다.

내 표정을 보고 금방 속마음을 읽은 최대표는 원작 그대로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맞춰 재구성하는데 그 번안을 윤대성씨가 하고 연출은 정일성씨가 맡는 등 당대 최고의 연극인들이 동원되었다는 것이었다. 제목은 '어느 아버지의 죽음'으로 바꿨다.

당시 한 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원작 '세일즈맨의 죽음'이 물질주의 팽배와 그에 따른 비인간화, 인간의 상품화 과정 등 1950년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고발하고 있다면 '어느 아버지의 죽음'은 197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팽배한 물질주의 가치관, 세속적 성공 신화, 비인간화 등으로 인해 빠르게 진행되는 인성왜곡과 가정파괴 과정을 그렸다. 두 작품 모두 중하류층 아버지와 아들을 통해서 이를 묘사했다. 다만 원작의 아버지가 자동차 세일즈맨이고 한국의 아버지는 보험외판원인 점이 달랐다.

원작이 워낙 탄탄한 구성을 갖춘 명작인데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는 익숙함이 있지만 우리 연극관객 수준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성공 확률이 낮을 것 같았다. 최대표와 부인 김민자씨가 출연, 극중에서도 부부로 나오는 것이 관객을 끌어들일 요인임이 분명해 그것이라도 크게 작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어느 아버지의 죽음'은 나의 그런 우려를 비웃으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최불암 등 최고의 연기진과 정일성 등 정상의 연극인들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지방공연까지 여세를 몰아갔고 연장공연 요청이 줄을 이었다. 모두들 기대이상의 호응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는 대목이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평소 연극 공연장과는 거리가 먼 중년이상의 남성들이 몰려들어 연일 만원을 이뤘는데 그것은 곧 기쁨이자 고통이었다.

자신의 인생이 물질 앞에서 하잘 것 없는 소모품이었고, 기대했던 자식들도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깨닫는 순간, 그래도 아들에게 보험금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자살하는 아버지를 보고 이 땅의 아버지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눈물을 펑펑 쏟은 것이다. 극중의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한국 남성들, 즉 울고 싶어도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인터넷에 떠도는 '아버지'라는 장시의 한 구절)이라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 어두운 객석에서 부끄러움도 잊은 채 마음놓고 울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김현승의 시 '아버지 마음'에서와 같은 아버지들이 그 때만은 술잔에 몰래 눈물을 적신 것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운 것이다.

거의 날마다 이 연극을 보러 온 남자 등 두 번 이상 본 관객이 부지기수였고 어느 아버지는 자녀들까지 데리고 와서 울고 또 울었다. 대구 광주 등 지방공연에서도 같은 현상이 이어졌다. TV 드라마 '전원일기'의 김회장 역을 하면서 한국 전통의 아버지 상을 지키려고 세심한 부분까지 애를 썼던 최대표는 흥행 성공의 기쁨과 우리 사회 아버지들의 추락상에 따른 안타까움이 뒤엉킨 착잡한 심정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 땅의 아버지들은 당시보다 나아졌을까 아니면 더 힘들어졌을까. 이 질문 자체가 어리석을 정도로 대답은 뻔하다. IMF사태, 실직자 홍수 등을 겪으며 아버지란 사람들의 위상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했고 이미지는 한없이 초라해졌다.

최근 어느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버지 절반 이상이 현재 아버지 역할에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30대에서 60대 사이 아버지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18.8%가 '아버지 역할이 많이 힘겹다'고 답했고 '어느 정도 힘겨운 편'이라고 답한 사람은 33.2%에 달해 결국  조사 대상의 52%가 현재의 아버지 역할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반면 '전혀 힘겹지 않다'(5.2%) '별로 힘겨운 편이 아니다'(22.6%) 등 아버지 역할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아버지는 27.8%에 불과했다. 과거에 비해 아버지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28%), '다소 떨어졌다'(33.6%)가 61.6%이었고 '다소 좋아졌다'(4.4%) '크게 좋아졌다'(1%)는 5.4%밖에 되지 않았다.

TV 드라마 속의 남자 혹은 아버지는 더욱 비참하다. 어느 신문 기사에 따르면 명예 퇴직 등으로 가뜩이나 혹독한 상황에 처한 가장, 아버지들은 가정에서조차 무시당하고, 겉도는 모습이 대부분이라는 것. 이 기사는 이처럼 아버지 모습이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 하나가 이처럼 불안정하면 그 가정 역시 붕괴위험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가부장적 아버지 상으로 회귀하자는 시대착오적인 남자는 거의 없다. 그런 정신 나간 남자들이 더러 없지 않지만 건전한 상식을 지닌 사람들은 아버지의 역할 변화와 그 무게의 증가를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수용한다. 다만 그에 따른 과부하와 피로도를 사회와 가정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데서 비참함과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가출을 꿈꾸며 사는 아버지들이 적지 않다. 아버지라는 배역과 가정을 훌훌 털고 철저히 혼자 되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꿈이다. 그것이 절대 이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들은 그 꿈을 버리지 않는다. 비록 꿈일망정 그것이 고단한 삶을 지탱해주는데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꿈은 다음의 우스개처럼 피로에 찌든 아버지들의 삶과 역할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수행하게 해주는 에너지가 된다. 지독한 역설이 지니는 긍정적 힘이 아닐 수 없다.
"엄마, 아기는 어디서 와?"
"다리 밑에서 주워 오지"
"나쁜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도둑질 못 하게 막아주는 건 누구야?"
" 경찰이야."
"집에 불이 나면 도와주는 건 누구야?"
"소방대원들이지."
"우리가 먹는 건 어디서 와?"
"농민들한테서 오는 거야."
"엄마?"
"왜?"
"그러면 아빠는 뭐 때문에 있는 거야?"

 '바른 조달' 여름호 (2006 07)

서울칼럼니스트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