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97 ]칼럼니스트[ 2006년 6월 30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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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의 오.남용 자제해야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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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야에 다 해당되지만 특히 언론에서 댓글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독자 투고, 전화, 대면 대화 등이 아날로그 시대의 여론과 시중 반응을 가늠하게 해주는 수단이었다면 디지털 시대에는 댓글, 이메일, 온라인 실시간 투표 등이 이런 것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종이신문은 성격상 댓글이 많은 제한을 받지만 온라인 신문은 거의 무제한이다. 댓글의 영향력 또한 날로 커지고 있다.

종이신문 구독자가 계속 줄어드는 반면 젊은층을 중심으로 온라인 독자가 증가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종이신문이 기자에서 독자 쪽으로 일방통행인데 비해 온라인은 쌍방향 통행이 가능하고 다수 독자가 참여하는 다자간 대화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므로 그 매력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종이신문에서는 어떤 기사를 읽어도 입체적이고 다각적인 윤곽을 잡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온라인 신문은 거의 즉시적 파악이 가능하므로 여기에 맛들인 독자들은 웬만해서는 종이신문으로 회귀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 그들을 이끄는 핵심요소가 바로 댓글이다.

오프라인 신문이라고 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안을 보도하면서 취재원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필수고 여기에 미흡한 점이 있으면 해설기사, 그 방면 전문가의 의견, 사설, 일반독자들의 반응 등을 다각적으로 게재한다. 여기에 견해를 달리하는 측이 있으면 그 반론을 싣고, 독자 투고나 전화 등을 이용한 시민들의 반응에도 귀를 기울여 공정한 보도가 되도록 최선을 다 한다.

그러나 온라인 댓글의 매력은 이런 것들 못지 않다. 어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읽으면 그 배경이나 시행 가능성, 사건의 내막, 취재원의 의도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물론 잘 다듬어지고 세련된 기자의 해설이나 전문가 글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욕설 범벅에 거칠고 껄끄러운 반론, 핵심이 흐려 요령부득인 것, 기자와 전문가 못지 않게 탁월한 식견과 탄탄한 문장력을 갖춘 것들이 뒤섞인 잡탕이 댓글난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현장감이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고 기사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측면을 접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담당기자의 해설기사나 전문가의 의견을 굳이 접하지 않아도 기사의 의도와 시중 반응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기자나 각 부문 필자의 처지에서도 댓글을 환영하면 환영했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아날로그 시대와 달리 기사가 나간 즉시 독자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고 반응의 양과 질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사작성에 오류가 있거나 독자가 어느 부분을 오해하는 경우, 즉각 시정이 가능하므로 한번 실수로 며칠씩 시달려야 했던 예전과 사뭇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댓글은 다각적이고 깊은 취재, 정확한 기사작성, 바람직한 방향 제시 등 기자 본연의 임무에 건전한 자극과 긴장을 제공한다.

기사나 글이 나갔는데 댓글이 하나도 붙지 않는다면 어떻겠는가. 무대에서 열심히 연기를 했는데도 객석이 완전 무반응일 때 느끼는 배우의 심정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잘못했다는 야유와 비난의 휘파람이라도 있는 것이 더 낫겠다는 식의 참담한 심정이 될 것이다.

굳이 독자 대중에게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일관되게 밀어붙이겠다는 예술가적 태도를 유지하는 필자도 있겠지만 저널리즘은 그래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자체모순에 빠지게 된다.

      간결한 3-4개 문장으로 구성  

 여론의 주무대가 온라인으로 이전하면서 댓글, 온라인 실시간 투표 등이 오프라인 세상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현장을 우리는 그 동안 많이 보아 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이탈리아 전등 몇몇 경기에 논란이 일자 영국의 BBC 등 세계 유수 언론매체들이 이를 이슈로 내걸고 투표 또는 댓글을 주문했다. 심지어 우리와 접촉이 비교적 뜸한 아랍세계의 어느 신문도 이런 난을 만들어 여론조사를 했다.
 
결과는 대체로 한국 편이었다. 물론 사실이 그랬으니까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의 주목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즉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참여한 것이다. IT강국답게 한국의 네티즌 들이 대거 참여, 한국에 찬성표를 던지거나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여러 가지 국제 인터넷 투표에서 드물지 않게 드러났다. 한국 네티즌들이 너무 극성스럽게 몰려들어 투표의 공정성에 문제가 제기되는 등 부작용이 없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인터넷에서 대세를 장악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해냈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젊은층 네티즌들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도 같은 맥락의 결과였다.

이처럼 날이 갈수록 영향력이 강대해지는 온라인 마당을 주목하며 그 유혹에 이끌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진보 청년단체인 6.15공동선언실천 청년학생연대(6.15청학연대)가 인터넷 여론을 장악하기 위한 행동지침을 세운 것도 그런 사례의 하나라 하겠다.

6.15청학연대는 지난 봄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홈페이지에 게시한 '반수구온라인 실천단 누리꾼 2월 계획'에서 '현재 수구세력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인터넷 여론을 장악'하기 위한 활동지침을 제시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 주요 포털사이트 토론방 댓글 달기 ▲ 진보개혁적 사이트에 글 남기고 자료 퍼 나르기 ▲ 인터넷 언론사 게시판에 글 남기고 자료 퍼 나르기▲ 한나라당 등 수구세력 사이트에 규탄 글 남기기 등이었다.

한편 선거법은 선거운동기간 특정 정당 사이트의 게시판에 접속해서 평소처럼 무심코 글을 올리거나 댓글 다는 행위를 규제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부적절한 방법으로 여론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려는 뜻이다.

이런 것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짐작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예에 불과하다. 댓글의 오용과 남용에 따른 이 같은 부작용들이 있다고 해서 쌍방향 또는 다자간 의사소통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댓글의 순기능과 중요성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의 논술공부를 위해 신문사설에 댓글 다는 것을 권장하고 있는데 이 역시 댓글의 순기능이 돋보이는 면이다. 일반적으로 댓글은 3-4개 문장으로 이루어지므로 간결. 명료를 생명으로 하는 글쓰기 연습에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반론을 제시할 경우 상대의 주장과 근거,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의 견해를 논리적으로 주장하며 그 근거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따라서 짧은 댓글 하나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독해력과 상당한 수준의 문장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장문의 논설을 쓰는데 댓글 만큼 효과적인 훈련도 드물 것이다.  
      공무원 댓글 권장은 무리수            
                   
댓글의 이러한 효용과 기능을 감안할 때 정부가 지난 봄 공무원들에게 댓글을 권장한 것은 외견상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나라살림을 맡은 공무원들이 시민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댓글을 활용한다면 권장하면 권장했지 뭘 탓하겠는가.

그러나 댓글 권장 의도가 언론과 국민이 납득할 만큼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았고 시행방법 또한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았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국정홍보처의 국정브리핑 사이트에 올린 언론보도에 공무원들의 댓글달기를 권장하고 그 실적을 각 부처평가에 반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또 정책사이트 방문 통계 파악을 이유로 공무원들의 IP(인터넷 주소)를 제출하라고 했다는 주장과 정부의 반론이 제기되고, 이런 것들을 청와대가 지시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설왕설래가 있었다.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이 인터넷 사이트를 자주 방문하고 가끔 댓글을 다는 것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다지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공무원들의 댓글쓰기가 청와대나 정부가 의도하고 주장한 것처럼 자발적으로 순수하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과거 국정최고책임자나 정부가 '자발적'이라거나 '국민을 위한'이라는 식의 명분을 앞세워 공무원들을 정권안보나 비리호도에 내몰고 강요하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자라보고 놀란 놈 소댕 보고 놀라더라고 아직도 과거의 피해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걱정이냐고 핀잔할 지도 모르지만 보수적인 관료사회 의식은 국민의 이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줄 만큼 두드러지게 변화하지 않았다. 공무원 사회 조직 자체가 갖는 경직성 또한 그 관성의 속도를 많이 줄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국정최고책임자나 고위당국에서 요청한 일들이 현장이나 말단에 이르러 왜곡되고 굴절되는 일이 흔하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해서 확인되는 관료사회의 속성이다.

논어 위정편 첫 머리에 정치를 덕으로 하면 유별나게 하는 일이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요지의 글이 있다. 즉 정치를 잘 하면 국정시스템이 제대로 작동, 국민들이 편하게 산다는 말쯤 된다.

이를 '군주무위 신하유위(君主無爲 臣下有爲)'라고도 한다. 국정최고책임자가 아무 일도 않는 듯 조용해도 실무자들은 많은 일을 한다는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이것이 가장 좋은 형태의 국정운영방법이다.

그런데 역사상 못나고 어리석은 왕이 정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면 간신배들이 임금의 의중에 있는 생각을 실행한다고 하여 멋대로 일을 하면서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다. 무능한 임금 역시 이것이 싫지 않아 스무고개식으로 의중을 내비치며 비위에 맞는 간신만 우대했다. 제대로 정치가 실현되는 '군주무위 신하유위'와 겉으로는 완벽하게 일치한 것이다.

이렇게 윗사람의 의중을 잘 읽고 코드를 잘 맞추면 유능하다는 식의 행태는 지금도 여전히 각 분야에 남아 있다. 지난 날 군사독재정권 시절에는 이런 방법이 매우 성행했다.

현 정권하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하겠지만 그런 속성은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 잠복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번 공무원 댓글달기 권장을 우려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온라인 공간을 자주 방문하고 댓글 다는 것도 디지털 사회에서 국민과 대화를 나누는 새로운 소통방법으로 백 번 찬성할 일이다. 전자민주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일에도 이를 악용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대통령이니 수상의  지위가 갖는 막강한 영향력에 부당하게 편승하려는 불순한 의도는 어느 국가 어느 사회건 곳곳에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국시대 한나라 소후가 바지를 갈아입으면 헌바지는 꼭 보관하도록 했다. 당시는 이를 좌우 신하들에게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걸 받으면 더할 나위 없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한소후가 이를 무시하니 주변에서 임금이 너무 인색하다고 쑥덕거렸다. 소후가 이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현명한 군주는 한번 찡그리고 한번 웃는 것까지도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찌 헌 바지 간수를 소홀히 하겠느냐. 잘 보관했다가  큰공을 세우는 자가 나타나면 줄 것이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정최고책임자가 어찌 좋고 싫음을 가벼이 드러내 신하들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오해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느냐는 뜻이었다. 최고책임자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한 뒤에 발표해 시행과정에서 조금의 착오나 자의적 해석의 틈이 없도록 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렇지 않으면 비리의 싹이 그 틈을 비집고 나오기 때문이다. 한소후의 깊은 배려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덕목이다.

국정최고책임자나 고위층이 댓글에 깊은 관심을 보이거나 이를 강력하게 권장할 때 언론과 국민이 우려한 것은 바로 이같은 공무원 사회의 속성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나라살림을 맡은 공무원들은 국민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제반 사항을 시행하고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도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자상하게 설명하고 과정을 알리는 것이다. 댓글은 그런 때 필요하다.

즉 일이 우선이고 댓글은 그 다음이다. 그러나 지난번 공무원 댓글권장은 행정일선업무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어 일보다는 댓글에 매달릴 개연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댓글을 오용 또는 남용할 여지가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언론과 국민이 이 점을 분명하게 하라고 했던 것이다. 시비를 위한 시비가 아니었다. 정부는 이럴 경우 그 취약점 여부를 살펴, 시정할 것은 시정하고 보완하는 큰 폭의 자기수용력을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관훈저널' 여름호(20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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