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81 ]칼럼니스트[ 2006년 5월 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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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기 2: 흰여우가 좌평 책상에 앉다


홍순훈 (아하출판사 대표,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http://columnist.org/hsh

백제 마지막 왕인 31대 의자왕(A.D.641-660)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앞의 칼럼 <금괴 무덤>(http://columnist.org/ref/2006/060505-1279sh.htm)에 썼듯, 신라 첩자로 보이는 백제의 반역자 무왕은 죽을 때까지도 백제를 해꼬지한다. 그 해꼬지는, 왕이 되면 안 될 자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 준 것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를 병탈한 신라 태종(김춘추)과 백제 의자왕을 아무 구분 없이 연이어 소개해 놨다. 두 인물을 비교한 의도적 편집인데, 왕위에 오르기 전, 김춘추는 '신성(神聖)한 사람', 의자는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렸다는 것이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로 효성이 지극했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해동증자라 하면 착하다, 사람이 됐다고 칭찬하는 것 같지만 그 숨긴 뜻은 의자가 왕의 재목이 아니다는 거다. 사실 효성과 왕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효도 잘한다고 국가 통치도 잘하는가? 효성(孝誠)은 감성에 의한 행위로 제가(齊家)에만 덕목이지, 냉철한 이성을 요구하는 치국(治國)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무왕에게는 의자 말고도 자식이 더 있었는데, 삼국이 사생결단하는 비상 시기에 자기에게 굽실거리기나 잘할 뿐 자격 미달인 의자를 왕으로 선택했다는 것은 무왕의 마지막 반역이며, 백제로서는 운이 다 된 참으로 불행한 사태였다.

그토록 형제 우애 있고 효도 잘했다는 의자가 왕이 되자마자 주색에 빠진다. 그는 위선자며 지독한 센티멘털리스트로, 자기 통제를 상실한 일종의 정신병자였다. 이런 자들의 특징은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영구 집권을 꾀한다.

백제가 망하기 3년 전인 A.D. 657년 정월에 의자는 그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준다. 좌평은 요즘의 장관급으로, 관직 16품 중 최고 벼슬이었는데 내신(內臣), 내법(內法), 병관(兵觀) 등 6좌평만을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41명이나 되는 자식들에게 좌평 벼슬을 주려니, 무슨무슨 '위원회', '센터', '본부', '특보'니 하는 좌평급의 새 조직을 열심히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몇 대만 자손이 번성하여 구멍 코드 인사를 행한다면, 백제의 모든 요직은 물론 통반장까지도 의자왕 직계가 장악하게 됨은 너무나 단순 명확한 계산이다. 그러나 세상 만사가 계산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니, 이런 맹랑한 인사는 오랫동안 '최소 경비로 최대 효과'라는 노하우를 쌓던 시스템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시스템 붕괴는 국가가 거덜났다는 뜻으로 감투자리가 0이 된다.

현재 한국의 장차관급 자리가 건국 이래 최다인 148개라고 한다. 나라를 망친 의자왕 때보다 몇 배가 더 많으니, 건국 이래가 아니고 '단군 이래' 최다일 것이다. 장관 한 달만 해도 죽을 때까지 거액의 연금을 타 먹으니. 이 연금이 식읍과 같은 기능일 테고.

백제가 망하기 1년 전인 A.D. 659년 1월에, <여우떼가 의자의 궁궐에 들어가고 / 흰여우 한 마리가 좌평 책상에 앉았다(一白孤坐佐平書案上).>
장관 책상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흰여우, 참으로 예리한 관찰력, 호남인들의 뛰어난 예술성은 이미 이 때도 빛나고 있었다. 흰여우가 어떻게 생긴 요물(妖物)인가 알아본 즉슨, 최근 관영 KTV와 기타 TV에서 생중계하는 인사 청문회에 비취는 쌍판들이 영락 없으렸다.

<A.D. 659년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흘레를 붙었으며 / 5월에는 사비 강둑에 큰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서발이요 이것을 먹은 사람은 다 죽었다 / 9월에는 대궐 안에 있는 회나무가 사람 울음처럼 울었고, 밤에는 대궐 남쪽 길 위에서 귀신이 울었다.>

옛글은 사물을 표현할 때 은유 또는 비유법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고지식하게 사실대로 미주알고주알 썼다가는 어느 날 어디서 그 글을 트집잡혀 목이 달아날지 모르기 때문. 백제 멸망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멸망 당시의 상황이 그 때 이미 은유적으로 기록됐던 것을, 일연이 전해져 내려온 그대로 삼국유사에 옮겨 적었던 것 같다.

그 은유를 풀어보면, <태자궁의 암탉과 작은 참새의 흘레>는 왕궁에서의 난잡한 또는 부적절한 성 관계, <큰 고기 먹고 다 죽었다>는 대형 뇌물 사건 발생, <회나무나 귀신이 울었다>는 백성들의 억울함 또는 불만 폭발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백제가 멸망하던 해인 660년에는 별의별 괴변이 다 일어난다.
<그 해 봄 2월에는 서울 안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했으며/ 서해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서 죽은 것을 다 먹어내지 못했고/ 사비수 물이 핏빛으로 변했으며/ 4월에는 왕머구리(두꺼비와 개구리) 수만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고/ 서울의 저자 사람들이 마치 붙잡는 사람이나 있듯이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다 엎어져 죽는 자가 백여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가 수도 없었다.>

우물은 아낙네, 사비수 강은 남정네의 일터다. 그 곳 물이 핏빛으로 변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가지 불만과 원한을 토해 냈겠는가?
백제 멸망 때도 개구리가 깝죽거렸다? 확실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동물이다. '까닭없이 놀라 달아나다 죽었다'는 사회가 패닉에 빠졌다는 의미다. 따라서 무법천지가 되어 '재물을 부지기수로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지사.

<6월에는 왕흥사 중들이 배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모두 보았으며 / 사슴만하게 큰 개가 서쪽으로부터 사비수 강변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다가 갑자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되었고 / 성 중에 뭇개가 길바닥에 모여 더러는 짓고 더러는 울기도 하다가 잠시 후에는 흩어졌으며/ 한 귀신이 대궐 안으로 들어와 크게 소리쳐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하고는 즉시 땅으로 들어갔으므로 왕이 괴상하게 여겨 그 자리를 팠더니 깊이 석자나 되는 곳에 거북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등에 글이 씌어 '백제는 둥근 달 바퀴요, 신라는 초생달과 같다' 하였으므로, 무당에게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둥근 달 바퀴라 함은 달이 다 찼다는 것을 말함이니 차면 이지러지는 법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말은 아직 차지 못했다는 것을 말함이니 아직 차지 못했다는 것은 차츰 차게 될 것이외다'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누가 말하기를 '둥근 달 바퀴는 융성하다는 뜻이요, 초생달과 같다는 뜻은 미약해진다는 뜻이니 우리 나라는 융성하고 신라는 미약해진다는 의미일까 하나이다'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심각한 센티멘털리스트의 특징인데, 의자는 남의 말에 지나친 과민 반응을 보였다. 거북등에 쓰여진 글귀 해석을 듣고 무당을 죽인 것이 그 예로, 몇 줄 안 되는 삼국유사 의자왕조에만도 왕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가 성충과 흥수 두 좌평이 옥에 갇히거나 귀양을 간 사실이 적혀 있다.
맘에 안 드는 소리를 하면 언론이고 나발이고 모두 소송을 걸어 예외 없이 혼꾸멍을 내 주겠다는 형태와 동일한 철저 보복형이다. 결국 이런 감성적인 통치는, 통치랄 것도 없는 X랄이지만 나라를 망쳤다. 그런데 나라를 망친 자체보다 그 후유증이 실로 비극적이었다.

멸망 후, 의자 본인은 물론 태자, 왕자, 대신 등 88명과 백성 1만2천807인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이들 핵심 인적자원이 제거되자 1천년 훨씬 넘게 타지역에 비해 백제 지역 경제는 침체됐고 뛰어난 인물이 등장할 수 없는 인간 황무지가 됐었다. 이에 따른 타지역민들의 모멸 역시 백제 후손들이 감내해야 될 업보였다. 지금 이른바 친북좌빨들이 '통일'이란 명분으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고려연방에 편입시키려 광분하고 있다. 이들 의도가 성공한다면 또 다시 북주남종(北主南從)이란 1천년 '한국의 비극'이 시작된다.
백제를 구하려면 우선 의자왕부터 제거했어야 됐듯, 한국의 비극을 막으려면 반역의 무리 좌빨들부터 처단해야 된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끝) -200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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