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76 ]칼럼니스트[ 2006년 4월 27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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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하숙집 아줌마가 아니었다
박연호 (칼럼니스트,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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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 boardinghouse reach라는 말이 있다. 식사할 때 소금그릇이 필요하면 Pass me the salt, please.라고 하는 것이 예의이며, 만약 자기가 직접 팔을 뻗쳐 집어올 때는 Excuse my boardinghouse reach.하면서 양해를 구해야 한다. '식탁 예의를 갖추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이다. 기숙사나 하숙집 같은 곳에서는 필요하면 자기가 직접 양념그릇을 집어 오는데 미국에서는 이를 버릇없는 행위로 간주, boardinghouse reach라고 하는 것이다.

부모의 보호와 감시가 없는 기숙사나 하숙에서는 이처럼 좋지 않은 버릇이 생기기 쉽다.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자식을 외지 학교로 보내는 부모 걱정의 상당 부분이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시절 나와 몇 친구들은 하숙집 아줌마로부터 톡톡히 교육을 받아 반대가 되었다. 지금까지 집사람도 인정하는 몇 가지 장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우선 양말 벗기를 들 수 있다. 남자들은 대개 뒤집은 채 그대로 휙 던진다. 그러나 우리 하숙집 아줌마는 절대 가만 두지 않았다. 그러면 몽둥이를 들고 와서 안팎이 본래처럼 되도록 다시 뒤집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재미있었다. "여기가 하숙집인 줄 알아? 그런 것 안 고치면 장가가서 마누라 애 먹여. 그래, 뉘 집 딸 속을 썩이려고 그러는 거야? "

속옷 같은 것을 제때 제대로 벗어 내놓지 않아도 벼락이 떨어졌다. 또 밖에서 돌아와 손발을 제대로 씻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다. 추운 겨울날 찬물에 손대는 것이 싫어 발과 발을 비벼 적당히 씻으면 귀신같이 알고는 똑바로 씻으라고 호령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추워도 실내에서 양말 신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발 건강에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내녀석들이 추위에 빌빌대면 보기 흉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대학생이라고 성인 대우 해주는 것이 이 정도였다. 고등학생들한테는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가끔 아침 치다꺼리가 끝나고 나면 방바닥에 배를 깔고서 편지를 썼다. 그들의  부모한테 정기적으로 하숙생활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쓸 때는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이건 하숙집인지 학교인지 분간이 안 갈 뿐만 아니라 하숙집 아줌마로서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있어 다른 데로 옮기려고 하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부모들이 반대했다. 그들로서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데 왜 옮기겠는가.

한번은 어느 학생의 아버지가 시골에서 부랴부랴 올라왔다. 그러면서 제발 자기 아들을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애걸했다.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말도 잘 듣지 않으니 나는 더 이상 이 애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 부모가 와서 다른 하숙으로 옮기도록 하라, 는 내용의 편지를 아줌마가 보낸 것이다. 아줌마로서는 많이 참다가 마지못해 보낸 최후통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하숙집이 어디 있겠는가. 부모가 직접 데리고 있는 것 이상으로 보살피고 보호해 주는데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싶을 턱이 없다. 하지만 아줌마가 워낙 완강하니까 며칠동안 머무르며 우리들한테까지 로비를 했다. 자네들은 아들놈의 선배 격이고 아줌마 신임을 그런 대로 얻고 있으니 자기를 좀 응원해 달라며 술까지 샀다.  

요즘 같으면 이를 하숙집 운영을 위한 고도의 상술이라고 풀이할 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줌마 자신이 설정한 책임감의 발로였다. 설령 상술이라 하더라도 권장하면 권장했지 탓할 것은 없는 방법이었다고 본다.

언젠가 친구가 찾아와 놀다가 저녁시간이 되자 돌아갔다. 부엌에서 일하느라 보지 못하고 나중에 눈치챈 아줌마가 나를 불러냈다. 지나가는 사람도 끼니때가 되면 불러들여 밥을 먹일 판인데 하물며 내 집에 온 손님을 그런 식으로 보냈느냐며 나무랐다.

예전에 하숙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친구가 와 있어도 야박하게 하숙생 밥만 달랑 주던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우리 아줌마는 반대였다. 그러면서 자기를 '하숙집 아줌마'로 만들었다며 매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로 집이 서울인 녀석들까지 놀러 와서 밥 먹고 뭉갰다 갈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없으면 아줌마나 그 집 아들(당시 고교생)하고 넉살좋게 놀다가는 친구도 있었다. 아줌마 넉살도 여간 아니었다. 김장배추 들이는 날 같은 때는 하숙생 전원은 물론 평소에 놀러오는 친구들까지 가능하면 동원해서 일을 시켰다. 평소에 하숙이 아닌 제집처럼 생각하고 살려면 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상당히 편리한 주장이었다.

우리들이 취업한 뒤에도 아줌마의 '보호'는 느슨해지지 않았다. 직장인이라고 해서 무단 외박을 하고 들어오면 '여기가 하숙집인 줄 아느냐'고 진담반 농담반으로 꾸짖으니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중에서도 남다른 '과보호'를 받아 첫 달 봉급부터 아줌마한테 압수 당했다. 홀몸은 돈을 헤프게 쓰므로 자기한테 맡겨놓고 날마다 용돈 일정액을 타가라는 것이었다. 결혼해서도 봉급을 그렇게 여자한테 맡겨야 살림이 제대로 되어간다면서...

또 하숙생들이 결혼할 때가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신부감을 보셨다. 그리고는 여자한테 신랑감의 버릇이 어떻고, 뭘 잘 먹으며 어떤 것을 싫어한다는 등 온갖 신상정보를 다 제공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불만을 터뜨리면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더냐며 한마디로 일축했다. 우리 집사람을 포함한 여자들도 처음에는 이상한 아줌마라며 놀랐다가 진심을 알고 나서는 남자들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일러바치기까지 했다.

아줌마 말대로 하숙이 아니라 우리들의 수련도장이자 고향집 같은 둥지였다. 내가 군대생활 3년을 포함해서 13년 동안 그 아줌마 밑에서 살았다고 하면 처음 듣는 이들은 믿지 못하는 얼굴이다가 이런 사유를 알고 나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 뒤에도 아줌마의 애프터 서비스는 끝내 주었다. 각 집의 살림살이 챙기는 것은 물론 우리들의 '군기' 잡기는 여전했다. 내 집에서 살다 간 녀석들이 신접살이에서 흉잡히면 안 된다는 아줌마 나름대로의 사명감이었다. 그래도 그런 감시가 싫지 않았던 것은 아줌마의 진심을 우리들이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아름다운 사람' 5월호 (200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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