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264 ]칼럼니스트[ 2006년 3월 14일
서울칼럼니스트모임 COLUMNIST 1999.09.19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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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공부 좀 해라”
박강문 (대진대학교 통일대학원 초빙교수, 서울칼럼니스트모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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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초 학부 강의 때 하는 내 고정 메뉴 잔소리가 있다. “한자 공부 좀 해라.” “책을 읽어라.” “담배를 피우지 말아라.” 대학생의 한자 실력에 관해 말해 보자. 강의실을 꽉 채운 학생들에게 종이를 나눠 주고 ‘대한민국’을 한자로 쓰라 하면 두엇 빼고는 ‘大’자 하나 써 놓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읽을 수는 있지만 쓰는 건 어려운데요.” 그럴 수 있다. 한자를 열심히 배운 세대인 나조차도 하도 쓰지 않으니 막상 써 보려면 어떤 자는 가물가물하다. “그럼, 이것 한 번 읽어 봅시다.” ‘천자문’에 나오는, 비교적 쉬운 글귀 ‘知過必改’를 칠판에 써 놓고 읽혀 본다. 이 네 글자를 다 읽는 학생은 아주 드물다.

학자의 길을 걷겠다는 젊은 대학원생의 한자 실력도 그다지 낫지 않다. 은사를 모시는 과 동문회 신년하례식에 가서 봉투에 넣은 회비를 식장 입구 접수 데스크에 않은 대학원생에게 디밀었다. “저, 선배님, 성함 가운데 글자가...” 그 학생이 ‘康’을 못 읽는다.

결혼 축의금을 낼 때 접수처에 앉은 젊은이가 옆의 젊은이에게 슬며시 봉투의 이름 글자를 묻는 것을 몇 번 본 뒤로 나는 아예 봉투에 이름을 한자로 쓰지 않는다.

한글 전용, 해야 한다. 이제 글쓰기가 대부분 컴퓨터 등 전자기기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한자를 섞어 쓰는 것은 비능률적이다. 그러나, 한자를 쓰지 않는다고 해서 배우지도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글 전용과 한자 학습은 다른 문제다.

우리말에는 한자어가 많다. 이것들을 꼭 한자로 쓸 필요는 없다. 쓰기에 매우 불편하다. 그렇지만, 한글로 적힌 한자어를 보았을 때 머릿속에 한자가 떠올라야 그 낱말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한글로 적힌 낱말 뒤에 숨은 한자를 머릿속에 그리지 못하면, 그 낱말을 엉뚱하게 사용하기 쉽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는 7일 외환은행 매각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조사해달라는 고발장을 대검찰청에 접수했다.” 중앙 일간신문의 기자가 쓴 기사의 한 부분이다. ‘접수’가 ‘接受’임을 알지 못해서 이런 이상한 글이 된다. ‘접수’를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는데, 신문에서 늘 보는 오류다. ‘자문’(諮問)이라는 말도 한자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정반대의 뜻으로 쓰고 있다.

‘피살’이 ‘被殺’임을 생각하지 않기에 “피살됐다”고 쓰고, ‘당선’이 ‘當選’임을 모르기에 “당선됐다”고 쓴다. ‘임차’와 ‘임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賃借’와 ‘賃貸’임을 모르는 탓이다. '결제'와 '결재'를 혼동하는 것은 '決濟'와 '決裁'의 차이를 몰라서다.

‘언론고시’라 할 만큼 심한 경쟁을 거쳐서 뽑히는 신문기자는 최상층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은 국민의 국어 교과서다. 수습기자 시험에서 한자 실력을 보는 신문사가 있는데, 아주 잘하는 일이다.

내가 대학 강단에서 한자 공부를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강의 때 나오는 용어들이 거의 모두 한자어기 때문이다. 신문방송학과 학생이 ‘신문고시’(新聞告示)를 “신문 기자 뽑는 시험”이라고 알고 있다면, 교수는 설명하는 데 몇 마디를 더 해야 한다. “언어(言語)는 사고(思考)의 집”이라는 말을 듣는 학생이 ‘事故’를 생각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는 교수는 그만큼 피곤하다.

학부 강의 때는 시간마다 ‘천자문’이나 '사자소학'이나 ‘명심보감’ 등에서 “施惠莫念 受恩莫忘”(베푼 은혜기억하지 말고, 입은 은혜 잊지 말라.) 같은, 비교적 쉬운 글자로 된, 교훈적인 글귀를 뽑아 하나씩 가르쳐 주고, 다음 시간에 확인해 본다. 학기말이 되면 고마워들 한다. 그러면, ‘천자문’에 있는 “得能莫忘”(능력을 얻었으면 잊어버리지 말라.)이 내가 하는 당부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이미 마쳤어야 할 한자 공부의 짐을 대학까지 끌고 오게 하는 교육은 잘못된 것이다.

- 서울신문 '열린 세상' 200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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